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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찾은 겨레말

‘쪼로로기’와 ‘쪼르래기’

_ 이길재 / 겨레말큰사전 부장

그 짬에 석이형은 뱀을 붙잡아 책가방에 넣고 쪼로로기를 닫은 다음 시치미를 따며 교실을 나왔다. 《최홍일: 동년이 없는 아이》
은희 어머니는 수선을 떨면서 트렁크의 쪼로로기를 열고 과자며 껌이며 우유사탕이며를 잡히는대로 꺼내 일일이 권했다. 《정호원: 진실한 거짓》
돈가방에 돈을 넣고 쪼르래기까지 알뜰하게 잠근 다음 녀자는 매대안에서 백사를 넣은 술병을 꺼내여 그의 앞에 놓았다. 《허련순: 도시의 상흔》
심애란이는 양복에 쪼르래기가 달린 보라빛자케트마저 벗고 누웠었다. 《리동렬: 고요한 도시》
중국 조선족 동포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쪼로로기’와 ‘쪼르래기’는 표준어나 문화어의 ‘지퍼’나 ‘쟈크’의 순우리말이다. ‘쪼로로기’나 ‘쪼르래기’는 형태상으로 보면 아주 비슷해 보이나 그 말 바탕은 서로 다르다. ‘쪼로로기’는 ‘지퍼를 올리고 내리는 소리’를 나타내는 흉내말 ‘쪼로록’에 명사 파생 접미사 ‘-이’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말이며([쪼로록+-이]), ‘쪼르래기’는 ‘작은 물체들이 한 줄로 매우 고르게 잇달아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흉내말 ‘쪼르르’에 ‘-아기’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쪼르르+-아기]).
또한 ‘쪼로로기’와 유사한 어형으로 ‘쪼르로기’도 중국 동포 작가들이 쓴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쪼르로기’는 ‘쪼로록’과 비슷한 흉내말인 ‘쪼르록’에 ‘-이’가 결합된 말이다([쪼르록+-이]).

헌데 돈보다 더 극비적이고 귀중한걸 품고 있듯 가방은 쪼르로기를 꼭 다물고도 성차지 않아 앙증맞게 작은 자물쇠까지 껴안고있었다. 《윤림호: 명암의 세계》
련미는 잠바의 쪼르로기를 쭈르륵 벗기고 남편의 팔을 살며시 잡았다. 《리광수: 새로운 길》
지퍼 표준어의 ‘지퍼’는 영어의 ‘zipper’를 그대로 들여온 말이며, 문화어의 ‘쟈크’는 영어 ‘chuck’의 일본식 발음 [チャック]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다시 말해서 문화어 ‘쟈크’는 일본어 ‘チャック’의 첫 번째 발음 ‘ㅊ’이 ‘지퍼’의 ‘ㅈ’의 영향을 받아 ‘ㅈ’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쟈크’는 지역에 따라서 ‘자꾸, 자크, 작쿠’ 등과 같이 쓰이기도 한다.

올이 굵게 짜진 깜장 모자를 썼고, 역시 국방색 잠바를 자꾸를 턱밑까지 바싹 올려 입고, 깜장색 통이 좁은 바지를 입었다. 《이호철: 1965년, 어느 이발소에서》
은희는 려행용가방의 자크를 열더니 옷가지들을 꺼 내 벽 장안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조선화: 최우등 졸업생》
동생 자크 좀 채워줘라. 《최인호: 처세술 개론》
“야, 이 잡것아. 작쿠 안 잠궈!” 《박범신: 물의 나라》
한국어를 사용하는 언어사회에서 유일하게 외래어 대신 고유어를 사용하는 언어사회는 조선족 언어사회뿐이다.
‘쪼르래기’는 북한 동포의 언어사회에서도 사용되는데 그 의미가 조금 다르게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진아는 학습장들을 가방에 넣자 쟈크의 쪼르래기를 쭉 당겨 솜씨있게 채웠다.《백의남: 넓은 교실》
북한의 작가 백의남의 소설의 한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쪼르래기’가 ‘쟈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위의 소설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북한 동포의 언어사회에서 ‘쪼르래기’는 ‘쟈크’를 열고 닫을 수 있는 조그만 장치를 의미한다. 이 ‘쪼르래기’가 ‘쟈크’를 열고 닫을 수 있는 장치뿐만 아니라 ‘쟈크’ 자체를 의미하는 말일 개연성도 충분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북 관계의 경색으로 인해 지금은 남북공동회의가 열리지 않아 이러한 어휘들의 의미를 바로바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 큰 아쉬움이다. 하루빨리 남북공동회의가 열려 이러한 어휘들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중국 동포 사회에서 사용되는 순우리말 ‘쪼로로기’나 ‘쪼르래기’를 남북한의 언어사회에서도 외래어인 ‘지퍼’나 ‘쟈크’ 대신에 사용하는 것은 어떨지! 겨레말

이길재


| 이길재 |

전북대학교 대학원 국어학 박사. 전북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 호남문화정보시스템 책임연구원 등을 지냈으며 현재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편찬2부 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전이지대의 언어 변이 연구>, <전라방언의 중방언권 설정을 위한 인문지리학적 접근> 등이 있고, 저서로는 『언어와 대중매체』, 『지명으로 보는 전주 백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