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탐구
우리가 만드는 말모이
‘겨레말 프로젝트’
배울 것이 많은 시대다. 국영수에, 예체능에, 학교에서도 방과 후에도 다들 바쁘다. 잠시 쉴라 치면 뉴스에, 피드에 학생이라도 챙겨봐야 할 것이 넘친다. 교육 현장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18년차 교사도 여전히 알아둘 게 많다. 그런데 우리는, 북한을 배우고 알려고 애써본 적이 있을까? ‘겨레말 프로젝트’는 여기에서 출발했다.
이것은 국어 수업이 아니다
나는 교사로서 재미있는 수업을 중시한다. 읽기를 즐기게, 쓰기는 겁 없게, 문법은 노래로 수업을 했고 자신 있게 말하고 듣도록 프로젝트와 활동도 많이 펼쳐봤다. 시 쓰는 교사인지라 각별하게 시집을 읽히고 시인을 초청하며 감성과 깊이를 더해주는 일에 집중했다. 그래서 사실 남북한 언어와 관련된 단원은 진도에 쫓겨 몇몇 어휘를 확인시키고 넘어가는 그런 단원이었음을 고백한다. 통일을 반대한다고 손드는 학생이 대다수였다는 핑계도 대본다.
올해는 수업을 설계하면서 남북 언어 학습의 ‘기회’를 만들어 주자는 목표를 새로이 세웠다. 초·중·고 12년 동안 학생들이 남북 언어를 배우는 유일한 교육과정인 중학교 3학년 1학기, 자기 주도적 학습을 하되 학습을 마치면 겨레와 통일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하자는 욕심이 생겼다. 국어 수업이지만 분단의 현실을 생각하고 하나의 겨레를 인식하며 미래를 꿈꾸는 것, 그것은 결국 국어라는 단일 교과수업이 아닌 나부터도 잊어버리고 있던 우리 삶의 이야기였다. 요즘 북한에서도 쓰지 않는다는 ‘얼음보숭이’와 같은 어휘 암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수업용 사이트 제작
수업 장면
통일 관련 설문
발견의 찰나,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수업을 시작할 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북한말을 외국어 사전에서 찾는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어릴 적 내가 ‘빨갱이’라는 말을 북한 사람의 얼굴이 빨갛기 때문이라고 인식한 것처럼, 지금의 아이들도 북한은 ‘낯섦’ 혹은 ‘불편함’이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북한말을 타국어로 인식했던 것이다. ‘겨레’라는 어휘도 처음 들어본다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프로젝트 준비 단계에서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아래 ‘사업회’)를 알게 됐다. 올해로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이 17년 차를 맞이했다는 것만큼이나 기존 사전에 없는 새로운 남북 어휘와 문화를 반영한 사전 작업이 지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특히 사업회에서 개발한 남북 어휘 검색 어플, 〈남녘말 북녘말〉은 우리 수업의 중요한 바탕 자료가 됐는데 150여 명의 학생들이 스마트폰에 어플을 설치하고 남녘말과 북녘말 단어를 검색해 보는 모습은 교과서를 넘어 학습의 반경을 넓혀줬다. 이 외에도 사업회 공식 누리집과 블로그 내에서 찾아낸 방대한 자료들은 실로 막연할 수 있는 남북 언어 수업의 근간이 됐다.
사업회 공식 누리집
애플리케이션 〈남녘말 북녘말〉
온&오프 말모이의 시간들
예전에도 한글날이나 우리말 관련 수업에서 ‘말모이’라는 순우리말로 사전 만들기 활동을 했다. 이번 수업에서는 남북의 어휘들을 알아보되 학년 전체 157명이 ‘함께 만드는 남북한 어휘 사전’이라는 공동의 과제를 수행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렇다면 프로젝트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까? 고민이 따라왔고 다음과 같은 진행 방법을 고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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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찾는 어휘들이 서로 겹치지 않으면서 모둠과 개인의 학습 과정이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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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온라인 도구로 학급별 내용을 공유하되 실제 눈으로 보이는 결과물을 만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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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단순히 사업회 자료를 받아쓰는 것이 아닌 스스로 탐구할 기회를 얻게 할 것
학급별 주제 선정 > 모둠별 개별 어휘 탐구
남북 어휘 카드와 ‘나만의 풀이’ 쓰기
먼저 《겨레말큰사전》에 가장 많이 수록될 것 같은 어휘와 범주를 살펴 대주제 6개를 정하고 6개 학급에 배분했다. 그 안에서 학생들은 〈남녘말 북녘말〉 어플을 활용해 스스로 중요한 어휘들을 선정했다. 물론 ‘통일 시대의 국어’라는 단원 성취기준에 맞게 우리가 꼭 알아둬야 할 어휘여야 한다는 기준을 줬다. 학생들이 탐구해 정한 어휘 중에서 모둠별로 한 번 더 대표 어휘를 4개씩 뽑게 했다. 그리고 개별적으로 1인 1어휘를 맡아 실물 사전에 붙일 어휘카드를 만었다. 모든 활동은 온라인 공유판(패들렛)과 오프라인 결과물로 동시에 작업해 학습의 입체감을 더했다.
36개 주제, 157개의 어휘가 모인 노란색 실물 사전이 완성됐을 때의 기쁨이란! 어휘 찾기에 나만의 풀이도 붙였기에 한 장씩 넘겨보는 재미가 있었다. ‘사업회에서 이걸 보면 기뻐할 텐데’라고 학생들에게 농담을 건네면서 나는 봤다. 그분들의 노고를 이해하고 그것을 우리가 함께 활용해서 뿌듯해하는 눈빛들을.
어휘를 찾고 사전을 만드는 활동 외에도 특별히 ‘상황별 겨레말’이라는 이름의 활동을 기획했다. ‘상황별 겨레말’은 남북에서 사용하는 어휘 중 서로 다른 용례를 모둠별 연극으로 표현하는 활동인데 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단계였다. 남과 북이 완전히 다르게 쓰는 어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통역 없이도 대화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은 학생들에게 꼭 알리고 싶었다. 우리는 이 연극처럼 언제고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 겨레라는 그 이름.
온라인 말모이 활동
학생 편찬위원회와 오프라인 말모이 활동
여기 또 하나의 편찬위원회
휘경여자중학교 학생을 줄여서 우리끼리는 ‘휘녀’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 사전의 이름도 《2022 휘녀 겨레말 말모이》로 정했다. 이 사전을 2023, 2024년에도 학교도서관에 계속 비치해 후배들이 학습의 결과물로 배우고 대대로 이어가기를. 그 안에는 ‘휘녀’들이 통일 시대를 생각하고 또 다른 미래를 열어주길 바라는 ‘쌤’으로서의 깊숙한 소망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는 교사만의 결정이 아닌 학생들의 의견이 담기길 바랐다. ‘휘녀 겨레말 편찬위원회(아래 ‘학생 편찬위’)’는 그렇게 시작됐다.
책 한 권도 쉽지 않은데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이 함께 만나 남북의 말과 마음과 생활을 담은 큰사전이라니, 이 거대한 작업에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고여있을까. 사업회에서 교육자료로 제공해 준 세밀화 파일만 봐도 큰사전에 담길 하나의 선, 하나의 문장마다의 정성이 그려진다. 학생 편찬위도 프로젝트 시작 전 홍보부터 마무리 영상 제작 및 도서관 비치까지 6명의 학생이 SNS에서, 또 학교 등나무 벤치에서 함께했다. 우리는 이 작업에 꽤 진지했기에 사업회의 편찬원들과 남북공동회의의 땀이 밴 시간을 간접적으로나마 헤아릴 수 있었고, 제법 의젓하게 수업에 참여하고 언어를 말하는 10대를 만날 수 있었다. 실제로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겨레말큰사전》을 대신해 우리만의 사전을 완성하고 방명록에 소감을 적을 때, 솟아나는 보람들을 이 글을 통해 사업회에 내어드리고 싶기도 했다.
남북 언어에 대한 사전을 만들고, 온라인 퀴즈판을 함께 완성하며, 상황극으로 실제 언어 사용을 경험한 이 프로젝트 수업의 5단계는 아래와 같이 설계됐고, 함께 즐기며 공부해준 157명 덕분에 무사히 그리고 뿌듯하게 마무리됐다.
모두 함께 남녘말 북녘말
돌아보면 정신없이 움직였던 한 달간의 프로젝트였지만 우리에겐 많은 것이 남았다.
157명의 손때가 묻은 《2022 휘녀 겨레말 말모이》가, 통일 뒤 하고픈 것을 빼곡히 적는 손들이, 겨레말이라면 이제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들이 남았다. 함께 찾아본 음식, 장소, 호칭, 건물들은 머릿속에 남아 남북의 구석구석을 채워줬다.
나는 수업의 설계자인 교사일 뿐이지만 ‘휘녀’들이 열심히 탐구했기 때문에 나의 남북 어휘장도 함께 넓어졌음을 밝혀둔다. 더불어 국어를 남한의 언어로 국한해 봤던 국어교사의 새 시선이 열렸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제주말도 북한말도 다 다른 지역의 우리말이라는 것을! 인식의 변화는 우리에게 또 얼마나 무한한 것들을 남겨주게 될 것인가.
8월 끝자락인데 가을바람이 불어오니 새삼스러운 오늘이다.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을까? 프로젝트의 첫 시간 학생들에게 말했다.
“통일을 강요하자는 것이 아니라 알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역사와 언어를 가진 민족, 익숙한 말인데 가을바람처럼 새로운 것은 결국 ‘우리’이기 때문. 통일 시대의 국어를 공부하는 이유이며, 우리 교육이 잊지 말아야 할 방향이며, 수많은 것 중에 배워야 할 중심인 것이다. 학생들의 스마트폰에는 〈남녘말 북녘말 〉 어플이 여전히 남아 있다. 사업회와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이 더 크고 분명하게, 지속해서 나아가야 하는 까닭이다.
최은숙
휘경여자중학교 국어교사. 2015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해 시인 ‘최설’로 활동 중이며 청소년을 위한 『윤동주 시 함께 걷기』 집필 및 중학교 국어 교과서와 문제집 집필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