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창
정령의 언어를 찾아서
김수우
시인
언어는 원래 어떤 씨앗이었을까. 어떻게 발아해 저렇게 무성한 숲을 이루었을까. 어릴 적 도서관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경이였다. 언어의 기원은 우주의 별자리만큼 신비하다. 언어학자들의 논리 이전에 우리의 언어는 생명의 DNA로 출렁이는 광막한 바다였다. 호모 사피엔스 이전부터 인간은 생존이 절실했다. 언어는 그 간절한 몸짓에서 시작했다. 몸짓과 언어는 뇌의 같은 영역에서 발달한다지 않는가. 몸짓이 생명의 탑을 쌓아 올리는 거라면 언어는 타자를 향해 짜는 그물과 같다. 그렇게 우리는 인드라망을 구성한다.
세네갈의 대통령까지 했던 시인 상고르는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너무나 유럽적인 데카르트의 명제에 대하여 아프리카인이라면, “나는 냄새를 맡는다. 나는 타자를 춤춘다. 나는 존재한다.”라고 바꾸어 쓸 것이라고. 참으로 명쾌하다. 인간의 모든 언어는 자연에서, 그리고 몸짓이 있는 구체적 삶의 관계에서 나왔다. 그것은 탯줄을 끊기 전부터, 옹알이를 시작하면서부터 우리 안에 형성된 어떤 부름이다. 인식 이전에 감지하는 대지의 울림과 떨림, 그것은 태어나는 순간에 부여받는 근원적인 선물이 아닐까.
이름 짓는 날
토착어는 그 지역의 구술문화 속에 뿌리내린 정신과 현장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구술문화가 가진 적층성은 뜨겁고 활기찬 존재의 힘을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지역어 그 자체로 우주적이며 생명적이고 대자연을 품고 있는 상상력인 것이다. 익히 알고 있는, 인디언이 이름 짓는 법도 그렇지 아니한가. 북아메리카 원주민 출신 식물학자인 로빈 월 키머러가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면서 쓴 『향모를 땋으며』에서는 인디언의 말을 더 이상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노인들과 함께 잃어버린 단어를 공부하는 인디언 모임들을 보여준다. 하나하나의 단어가 그 자체로 생명이다. 다음은 나이지리아 시인 하리 가루바의 시편이다.
너의 비밀스러운 이름, 신성하고 성스러운, 네 영혼의 윤활유
너와 네 몸의 영혼들에게만 알려진,
네가 의식할 수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는 이름

이것은 바람과 물이 네게 속삭일 이름이야
나무들이 너를 알아보는 이름,
달이 밤과 더불어 너를 찾아올 이름
별들과 하나 되어 너의 꿈을 깨워 고양시키는 이름

- 하리 가루바, 「이름 짓는 날」에서

그는 알파벳을 통한 제국적인 사유가 세계와 존재를 어떻게 삭제하는지를 파고든 작가였다. 위 시는 식민지 지배자들이 엎어버린 아프리카의 고유한 정신은 정령이 선물한 이름 속에서 회복됨을 강조하고 있다. 본래적인 영성과 역사성을 회복하려는 투쟁은 결국 사유를 길들인 알파벳을 넘어서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한 호출 이전에 오래된 부름을 상기시키는 근원어로서의 이름. 때문인지 아프리카나 안데스 산맥, 아시아 골짜기의 무수한 소수 부족들의 이름은 하나같이 대자연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식민지를 겪는 동안 제국주의가 강제한 언어는 그들의 본래적 자아를 얼마나 왜곡시켰던가.
그렇다면 중앙 중심인 우리가 쓰는 표준어도 제국적인 기호의 체계는 아닐까. 기호화, 획일화된 언어는 지배 구조를 가지고 우리 삶을 정형화시킨다. 이 지배자의 문법은 우리 정신을 규격화시키면서 끊임없이 의미를 강요하는 상징계로 작동한다. 하지만 위 시편에서처럼 언어는 대자연의 호흡 같은 것이고, 존재의 근원을 회복시키는 정령의 노래 같은 게 아닐까.
우리의 영혼이 적층된 겨레말
토착어는 그 지역의 진동을 가지고 있다. 그 울림과 떨림은 문법적 사유와 다른,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감수성이기도 하다. 언어를 도구적으로 사용하면서 잃어버린 것이 바로 현장에서 오는 진동이다. 이 울림은 내재와 초월이 애초 한 방향임을 보여준다. 그렇게 토착어에선 자연스런 소통이 발현된다.
표준어는 정신을 규범화하는 사슬이 되면서 차츰 기계적인 세계에 반응하는 조건으로 작동한다. 관념적인 지식과 과학 논리는 토착어를 불합리한 세계로 이해한다. 이 과정에서 쏟아진 모든 텍스트들은 보이지 않게 제국적인 정신을 낳고 있다. 획일화된 언어는 우리 안의 무한을 향해 뻗는 그 아름다운 지역어의 음성을 어떻게 삭제하는가. 근원어 또는 지역어들이 가지고 있는 존재감은 어떻게 함부로 상실되었는가. 무수한 정보들이 넘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이 결여된 현실, 불신과 불안이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영혼이 있는 자들은 깨닫는다. 지역 정신은 표준어로는 이야기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지역이 품은 기존의 서사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지역 정신이 낳은 정령의 노래, 실재계의 음성을 경청하는 공동체의 언어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공동체의 언어관습을 회복하는 것은 주변을 채우고 있는 기호들과의 보이지 않는 투쟁일 수밖에 없다.
지역어에는 그 지역의 정서와 영성이 고스란히 담긴다. 보다 다층적인 소통은 존재감을 고양시킨다. 구술성을 회복해낼 때에야 그 지역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살아나게 된다. 혀는 구체적인 말, 뱃속의 옹알이로 배운 숨결 같은 말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혀는 거대한 우주목 아래서 배운 경외의 노래를 아득하게 잊었다. 믿음이 없지만 그지없이 성실한 신자처럼 삶을 꾸려낸 민중들, 그들의 영혼이 적층된 겨레말을 우리는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을까.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이 절대적 가치로 매김되는 것은 바로 공동체의 언어관습을 회복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과 북, 그리고 한반도 전 지역의 토착어를 한 톨 한 톨 보석처럼 캐내는 노력은 어떤 정치적인, 경제적인, 문화적인 것보다 미래적 가치이다. 제국적인 사유와 행동을 지배하는 기호들을 넘어서려는 이 힘은 근원을 회복하려는 21세기의 생태적 흐름인 까닭이다.
다양하게 반짝이는 지역어
토착어는 내 안의 타자성을 회복하는 가장 좋은 지름길이다. 전 지구적 위기에 처한 이 시대가 요청하는 인문의 뿌리라는 말이다. 사투리가 가진 울림, 그 진동의 폭들이 만들어내는 떨림, 그것이 대화이다. 마르틴 부버가 『나와 너』에서 언급한 관계, ‘나-그것’이 아닌 ‘나-너’의 관계는 이 진동의 힘을 말한다. 보이지 않는 힘이 만든 파동에서 우리는 존재의 진정성을 읽는 것이다. 그것이 지역어가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토착어는 단순히 음성기호학이나 문법체계에 담기지 않는 세계를 전달해낸다. 반면 중앙어인 표준어는 이 진동이 없이 편리와 유용성의 체계 속에서 기능적으로 작동한다. 기계적이고 도구적이고 대상화된 표준어 사이에서 우리의 사유는 매우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
옛말을 지워버리면 유구히 흘러온 민족의 몸짓과 관계도 지워진다. 할머니가 쓰던 말들이 버려지지 않고, 시대의 물결을 넘어 우리 사이에서 아직 반짝인다면 그때 우리는 제대로 된 역사를 가진 것이다. 지역어는 본질적이고 토속적인 문화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극단적인 자본주의 속에서 정신을 획일화하는 중심주의에 저항하는 노력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지역어를 지키는 일은 소유나 소비가 아닌 지역의 존재론적인 문화를 옹호하고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지역어가 함유한 문화의 뿌리는 기실 얼마나 어마어마한 유산인가. 국제화에 맞춰 온 국민이 영어에 열심이지만 모든 외국어와의 교류나 번역 작업도 겨레말이 풍부할 때 보다 명확해지고 가치를 발한다. 언어의 감수성이 그만큼 다층적인 문화를 가로지르는 힘임을 인지할 때 지역어가 진정한 미래의 자산이라는 말이다.
굳이 통일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은 우리 민족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작업이며, 유일하고 근원적인 희망이다. 한 지역의 토착어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토착어들이 즐겁게 이해될 때, 북한의 지역어들도 자연스럽게 다가올 때 그때 우리 문학이 제대로 다시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지역어들의 다양성이 살아 반짝일 때 진정한 노래가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진정한 노래란 결국 내 안의 타자성이 눈부시게 발현하는 순간을 말하지 않을까. 겨레말
김수우
시인. 백년어서원 대표.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길의 길』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붉은 사하라』 『젯밥과 화분』 『몰락경전』, 산문집 『쿠바, 춤추는 악어』 『어리석은 여행자』, 옮긴 책으로 『호세 마르티 시선집』 등이 있다. 부산작가상, 최계락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부산에서 글쓰기 공동체 ‘백년어’를 열고 공존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