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풀이 깁고 더하기

상륙(上陸)

김민선 겨레말큰사전 편찬원

새해가 되면 새로운 마음으로 다양한 계획들을 세우곤 한다. 작년은 벌써 ‘낡은 시간’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새 일상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품기도 한다. 하지만 내년 새해에는 올해를 완전히 지우고는 새로운 계획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2020년은 유례없던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모두가 혼란과 혼돈에 빠지고 오랜 시간 지쳐버린 한 해였다. 지난여름엔 기록적인 장마와 연이어 상륙해 오는 태풍으로 ‘살아있는 것’이 모두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듯 두려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정부에서 보내오는 안전 안내 문자는 ‘거리 두기’, ‘외출 자제’, ‘마스크 착용’과 함께 ‘대피’, ‘안전’, ‘주의’ 같은 단어들로 채워졌다.

기상(氣象)과 관련된 보도에서 장마전선이나 태풍의 이동 경로를 예측할 때 자주 쓰이는 표현이 ‘상륙(上陸)’이다.

  • 장마전선은 제주도에 7월 15일 상륙하고, 이틀 뒤 남부 지방에 도달할 전망입니다.”

    “기상청은 제10호 태풍 ‘하이선’이 7일쯤 남해안에 상륙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비와 바람을 안고 해상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장마전선과 태풍의 이동 경로를 사람이 항해를 마친 배에서 내려 육지로 올라오는 모습에 비유한 것인데, 인터넷 뉴스기사에서 ‘상륙’을 검색해 보면 이제는 위와 같은 의미가 ‘상륙’의 본래 뜻보다도 더 높은 빈도로 쓰이는 것처럼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웹)》과 《조선말대사전(2017)》에서 ‘상륙’을 찾아보았다.

《표준국어대사전(웹)》 《조선말대사전(2017)》
상륙1(上陸) [상ː뉵] 「명사」
배에서 육지로 오름.
상륙1(上陸) [명사]
배에서 내려 뭍으로 오르는것.

남과 북의 국어 대사전에는 모두 기본 의미만으로 풀이되어 있다. 우리에게는 한국전쟁의 가장 유명한 작전명에 이 단어가 포함되어 있어 남북 대사전에서 제시하고 있는 풀이가 꽤 익숙한 편이다. 겨레말 말뭉치에서도 남북 모두 기본 의미로 쓰인 용례가 다수 나타난다.

  • ㄱ. 우리는 배를 저어 가까운 백사장에 상륙한다. 《홍성원: 사공과 뱀》

    ㄴ. 요새 우리패가 수백명 밤에 배를 타고 와서 상륙을 했답니다. 《석개울의 새봄》(북)

한편, 남측에서는 기상 보도 외에 문학 작품에서도 태풍과 장마가 내륙에 다가온다는 의미의 ‘상륙’이 많이 쓰이고 있다. 겨레말 말뭉치에서 예를 찾아보았다.

  • ㄱ. 태풍은 여전히 내륙 쪽으로 몰려오고 있었고 상륙 시간은 대충 세 시간 정도 남았다. 《한창훈: 홍합》

    ㄴ. 여름이 끝나갈 무렵, 제13호 태풍 비러가 한반도에 상륙했다. 《김연수: 원더보이》

그리고 아래와 같은 용례에서는 앞에 나온 두 의미보다도 더 확장된 쓰임을 확인할 수 있다.

  • ㄱ. 바야흐로 비틀즈가 이 한반도에 상륙한 시기였다. 《이순: 혜봉이》

    ㄴ. 뮤지컬 ‘위키드’ 내년 5월 부산 첫 상륙1)

위 예문에서는 어떤 나라의 물건, 문화, 사람이 다른 나라로 들어갈 때에도 ‘상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유명 통신기기 회사의 신제품이 한국에서 출시될 때, 다수의 매체에서 ‘○○폰 국내 상륙 임박’과 같은 제목의 기사를 내는 것은 이제는 거의 공식화된 듯하다.

이처럼, ‘상륙’은 기본 의미에서 번져 나간 비유적인 쓰임이 확대되면서 그 의미들이 점차 뜻갈래로서 지위를 획득해가고 있다. 말뭉치 데이터를 바탕으로 편찬된 《고려대한국어대사전(2009)》과 《연세현대한국어사전》2)의 풀이가 그것을 보여준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2009)》 《연세현대한국어사전》

상륙 [上陸] [상:뉵] [명]

  1. 배에서 내려 육지로 오름.
  2. 어떤 나라의 문화나 물건 또는 자본이 다른 나라에 수출되거나 들어감.
  3. 장마나 태풍이 바다를 건너와서 육지에 들이닥침.

상륙 上陸 (명사) [상:뉵]

  1. (주로 군대가) 배에서 내려 뭍으로 오르는 것.
  2. (장마나 태풍 등이) 바다를 건너와서 육지에 들이닥치는 것.
  3. 어떤 한 나라의 물건이나 자본이 다른 한 나라에 수출되거나 들어가는 것.

사전도 그 속도가 더디기는 하지만 언어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하는 물성(物性)을 가지고 있다. 단어를 풀이하는 방식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같은 단어라도 사전마다 조금씩 다른 풀이를 제시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사전편찬학에서도 언중들이 사용하는 세밀한 언어 정보를 효과적으로 반영하려는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다. 방대한 말뭉치 자료가 축적되고 그 안에서 다양한 의미와 용법을 분석하는 기술이 향상되면서 ‘살아 있는’ 말을 충실히 반영하여 기술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가는 듯하다.

‘상륙’은 기본 의미에서 출발하여 지금은 ‘태풍과 장마’, ‘문화와 문물, 사람’들을 주어로 하는 확장된 의미까지 풍부하게 사용되고 있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과 《연세현대한국어사전》은 ‘말뭉치’라는 언어 자료 속에서 그러한 쓰임을 건져 올렸고, 독립적인 뜻갈래 지위를 부여하여 사전에 실어두었다. 다만, 《표준국어대사전》의 경우 아직은 기본 의미와 나머지 뜻갈래의 지위를 같게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듯하다. 한편, 《조선말대사전》의 경우, 북측에서 확장된 의미의 ‘상륙’이 전혀 쓰이지 않는 것인지, 뜻갈래를 추가하는 기준을 엄격하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지금은 잠시 중단된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회의가 다시 열린다면 직접 확인해봄 직하다. 국어사전 속 ‘상륙’의 풀이는 완결된 것이 아닌 ‘진행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전의 문법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한 해를 겨우 겪어내고 맞이한 2021년은 원대한 꿈이나 이상보다 소소한 의미가 있는 계획들로 채우고 싶다. 새해에 바라는 소망이 하나 더 있다면 치료와 치유가 필요한 모든 곳에 하루빨리 백신이 ‘상륙’하여 내년 이맘때에는 휴대폰 문자에 ‘안심’, ‘여행’, ‘행복’, ‘감사’와 같은 단어들이 채워졌으면 한다. 겨레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