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리 방언곡곡

‘별과 바우솜’

이길재 겨레말큰사전 부장

“그 에미나이래 {별에서} 떨어딨다 아이 합네까?”

“댜는 {별에} 왜 올라갔다 합데까?”

이 ‘별’들은 윤동주의 ‘별’도 아니고, 알퐁스 도데의 ‘별’도 아니다. 위에서 쓰인 ‘별’은 어렸을 적 필자의 아픈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별’이다. 아궁이에 불을 때고 구들을 덥혀 난방을 하던 시절 땔나무를 하겠다고 동네 뒷산에 올라가 땅속에 박힌 고주박1)을 뽑으려다 산에서 굴러 ‘벼랑’으로 떨어질 뻔한 적이 있다. 벼랑에 떨어지기 직전 찔레나무 넝쿨에 걸려 큰 사고를 피하기는 했지만 그때 구르면서 나무 그루터기에 찔린 흉터가 지금도 얼굴에 남아 있다.
‘별(<별ㅎ)’은 필자에게 아찔한 기억을 남긴, 그 ‘벼랑’의 옛말이자 량강, 평남, 함남, 황북 지역의 방언형이다. 표준어 ‘벼랑’은 ‘별ㅎ’과 명사 파생접미사 ‘-앙’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말인데 방언형들 중에는 표준어의 이전 형태들이 많다. 가령 아래 용례에 나타나는 ‘똬리’의 방언형 ‘또바리’, ‘모래’의 방언형 ‘몰개’ 등도 모두 표준어의 이전 형태들로 볼 수 있다.2)

김 장자댁 집 부근을 지내다가 보니 철원이 아버지는 꼽새등 하여 꾸부러지고 앉아 짚신을 삼고 있고 철원 어머니는 또바리를 만들어 팔아서…. 《송숙영: 무당 할미》

파랗게 움트던 보리싹이 연기에 끄슬리고 빈터만 남은 자리에 몰개바람이 재가루를 흩날리던 그 35년도 초여름날아침은 슬픔으로 가득찼던 날이였다. 《봄의 축복》(북)

‘벼랑’의 방언형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별’과 명사 파생접미사 ‘-이’가 결합된 ‘벼리(<별+-이)’는 자강, 평북, 함남, 황북 지역에서, 명사 파생접미사 ‘-악’이 결합된 ‘별락(<별+-악)’은 강원 지역에서 쓰인다. 이 밖에도 ‘벼랑’의 방언형으로는 비렁이/비렝이(함북), 비럭(경남), 벼루(충남), 벼랑이(중국), 벼락(황북), 듬서리(경남), 기정(제주), 양창(함경), 빈정(경남) 등 아주 다양하게 나타난다.이들 중 비렁이/비렝이, 비럭, 벼루, 벼랑이, 벼락 등은 모두 ‘벼랑’의 옛말 ‘별ㅎ’ 형태와 관련된 방언형들이다.

한편, 이 ‘벼랑’에서 잘 자라도록 최적화된 식물이 ‘바위손’이다. 땅속줄기 끝이 땅 위로 나와서 바위벽에 붙어 자라는 이 여러해살이풀은 ‘벼랑’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바위손을 집에서 길러본 적이 있는데, 미처 물을 주지 못한 날이면 물기가 바싹 말라 주먹을 꼭 쥔 듯 줄기를 바짝 오므리고 있다가, 물을 주면 금세 손을 펴듯이 활짝 피어나는 것이 신기했다. ‘바위손’은 전라 지역에서는 바위솜, 바오솜, 바우솜, 바이솜, 바구손, 방구손이라고 한다. ‘손’과 ‘솜’에 결합된 바오, 바우, 바이, 바구, 방구는 모두 ‘바위’의 방언형들이다.
필자의 고향에는 해발 400미터쯤 되는 ‘능바우’ 산이 있다. 이 산의 등성이는 바위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길이는 700여 미터, 높이는 줄잡아 50여 미터쯤 되었다. 온통 바위손으로 뒤덮인 그 바위 절벽의 모습이 마치 목화솜 뭉치를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줄곧 ‘바위손’을 바위솜, 바우솜이라 불렀던 것 같다. ‘바위손’의 방언형에 결합된 ‘솜’이 단순히 ‘손’의 변이형인지, 아니면 목화에서 뽑아낸 ‘솜’인지, 완전히 다른 형태에서 온 말인지에 대해서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

‘능바우’ 밑으로는 세 개의 너덜겅3)이 있었고, 그 가장자리에는 다래, 머루, 으름, 꾸지뽕 등 먹을 것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고향을 떠나온 지 벌써 10여 년이 흘렀다. 올해가 가기 전에 꼭 고향을 찾아 이 모든 기억들을 되돌려 보고 싶다. 겨레말

  • 1)박힌 채 썩은 소나무의 그루터기.
  • 2)또ᄫᅡ리>또아리>똬리, 몰개>모래
  • 3)돌이 많이 흩어져 있는 비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