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탐구

내가 에스페란토를 공부하는 이유

Kial mi lernas Esperanton?

신현규 한국에스페란토협회 어학위원

다니던 대학교가 외국어를 교육하고 연구하는 곳이라 그런지 학부생이었을 때부터 어떤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곤 했다. 대개 답변은 한국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한다는 농담으로 시작하여 에스페란토 화자라는 것을 밝히는 것으로 끝이 났는데, 그 답변 뒤에는 으레 ‘에스페란토가 무엇인가요?’, 또는 ‘에스페란토를 실제로 할 줄 안다고요?’와 같은 질문이 따랐다. 에스페란토를 구사한다는 것은 에스페란토에 대하여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모두에게 신기한 일로 여겨지는 듯하다. 아직 에스페란토는 설명이 많이 필요한 언어인 것이다.

에스페란토는 폴란드의 안과의사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가 유럽 여러 언어의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없애거나 줄여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게 창안한 ‘인공언어’1)이다. 본디 이 언어는 1887년에 국제어를 뜻하는 ‘Internacia Lingvo’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으나 후에 자멘호프 박사의 필명이었던 ‘D-ro Esperanto(희망하는 사람)’에서 딴 지금의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각 민족이 다른 민족 또는 국가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고유의 언어를 지키면서 교통어(交通語)2)로 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1민족 2언어주의에 입각한 에스페란토는 현재까지 가장 성공한 인공언어로 평가되며 전 세계에서 200만 명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
이 언어가 창안된 이후로 130여 년이 흐르면서 에스페란토 화자를 부모로 두어 모어가 에스페란토인 사람도 수천 명으로 늘어났는데 이들을 ‘데나스쿨로(Denaskulo, 원어민)’라고 부른다. 에스페란토를 ‘습득’한 데나스쿨로를 제외하면 대다수의 에스페란토 화자는 모어가 따로 있고 에스페란토를 ‘학습’한 경우에 해당하기 때문에 필자를 포함한 여러 에스페란토 화자가 받는 질문이 ‘학습 동기’, 즉 ‘왜 에스페란토를 배우게 되었는가’인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에스페란토 화자입니다

에스페란토를 배우게 된 동기는 사람마다 다양하다. 필자처럼 에스페란토의 어학적 특성에 흥미를 느껴서 배우게 된 사람도 있고, 평화와 중립을 추구하는 에스페란토의 철학과 이상에 이끌려 배우게 된 사람도 있다. 이 밖에도 원불교나 대안학교 등 에스페란토를 지원하는 조직의 영향으로 이 언어를 처음 만나게 된 사람도 있다. 필자가 ‘에스페란티스토(Esperantisto)’라는 용어 대신에 ‘에스페란토 화자(Esperanto-parolanto)’라는 건조한, 그러나 의미 폭이 넓은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처음 에스페란토의 존재를 안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다니던 학원의 국어 강사로부터 ‘예전에 에스페란토를 공부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아주 단순한 호기심에 바로 인터넷에서 에스페란토를 검색했다. 에스페란토 문자에 ‘Ĉ, Ŝ, Ŭ’와 같이 확장된 로마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막연히 에스페란토가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자료들을 찾아 초급 수준의 공부를 해보았다.
이후 수험 공부를 핑계로 밀어 두었던 에스페란토를 다시 만난 것은 수능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 때. 사설 모의고사에서 국어 영역 문제를 푸는데 마지막 문항의 지문이 다름 아닌 에스페란토에 대한 것이었다. 에스페란토의 품사가 형태적으로 규칙적이라는 점을 이용한 문제였는데, 짧게나마 에스페란토를 공부했던 경험 덕분에 지문을 다 읽지 않고도 답을 바로 고를 수 있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 외국어 관련 교양과목 목록에서 〈에스페란토어의 이해〉라는 수업을 발견했을 때에는, 더는 이 운명을 피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필자의 학습 동기를 물을 때 “내가 에스페란토를 배운 게 아니라 에스페란토가 자꾸 나를 찾아왔다”라고 농담 삼아 대답하기도 하는데, 비유하자면 그 수업이 내게는 에스페란토의 ‘마지막 노크’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한국에스페란토협회(Korea Esperanto-Asocio, 아래 ‘협회’) 명예회장이자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교수인 이영구 선생님께 에스페란토를 배우게 되었다.

배우는 것을 넘어 에스페란토계에서 활동하게 된 것은, ‘에스페란토를 제대로 쓰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모든 언어가 마찬가지겠지만 일정 수준 이상으로 구사하게 되면 이제 에스페란토도 ‘배우는 언어’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발전하게 된다. 대학교 동아리, 등산, 시 낭송, 여행 모임 등 다양한 에스페란토 소모임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협회는 전반적인 언어 운동을 도우면서 전국적인 행사를 조직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필자는 대학교 내 에스페란토 동아리를 거쳐 한국에스페란토청년회(Korea Esperanto-Junularo, 아래 ‘청년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비교적 수평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협회와 청년회의 조직문화 속에서 다른 청년회원들과 함께 협회 활동에도 종종 참여하고 있다.

한국 에스페란토계의 연구 동향

현재 한국 에스페란토계의 연구는 협회 안팎으로 진행되고 있다. 먼저, 협회 밖에서 진행되는 연구 주제로는 안서 김억으로 대표되는 한국 문학과 에스페란토 문학의 접점이나 일제강점기에 에스페란토 화자가 몸을 담았던 아나키즘 운동, 에스페란토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 정신 등이 있다.
그리고 협회를 주축으로 하는 에스페란토 연구는 사회 현상과 에스페란토의 관계를 분석하고 고민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일례로, 2019년에 ‘2·8 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시가 배포한 번역본 『2·8 독립선언서』에 에스페란토 판이 포함되었는데 이 사업에 참여한 최대석 리투아니아 빌뉴스대학교 교수는 『2·8 독립선언서』 에스페란토 판의 의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배언어의 일방적 강요에서 벗어나 서로 다른 민족이 중립적인 언어로 상호 이해하고, 나아가 평화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 에스페란토의 창안 목적이었다. 이러한 에스페란토의 정신이 독립국과 자주민의 기치에 부합하는바,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이남선, 개최를 선언한 백남규가 한국 에스페란토 운동사에도 등장하는 것이다. 이번 ‘2·8 독립선언서’의 에스페란토 번역은 이러한 뜻이 다시 한 번 세상에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 협회장으로서 제52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와 제2차 상하이-서울 에스페란토 포럼을 담당한 서진수 강남대학교 교수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제52차 한국에스페란토대회는 인공지능과 자동번역 시대에서 에스페란토가 나아갈 길을 논했다. 첨단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직 인간 소통에서 과반 이상을 차지하는 ‘언어 외적인 요소’가 해결되지 않았고, 또 여러 국제회의에서 재정의 10퍼센트 이상을 통·번역에 할애하는 실정이다. 그런 면에서 통·번역에 관한 지출 없이 세계 80여 국가의 참가자가 참여한 이번 대회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2차 상하이-서울 에스페란토 포럼에서는 역사적·정치적 관계가 복잡한 한-중 두 국가가 차이를 인정하고 상호 협업·소통하는 정신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에스페란토가 지향하는 화합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필자가 에스페란토에 대해 연구하는 부분은 주로 어학적인 측면이다. 일례로 협회 기관지 《La Lanterno Azia》의 2018년 7·8월호에 실린 필자의 졸문 「한국어 ‘ㅈ’의 에스페란토 표기에 관하여: Ĝ인가 Ĵ인가」는 한국의 지명·인명을 에스페란토로 표기할 때 발생하는 음운 대응과 전사(轉寫) 문제를 다룬다. 덧붙여 현재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것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에 외친 ‘코레아 우라(후라)’가 에스페란토일 가능성을 언어학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이로써 끊임없이 필자의 문을 두드려왔던 에스페란토에 대한 연구가 ‘역사와 세상 공부’로 이어지고 문명의 금자탑에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겨레말

  • 1)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통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언어. ‘에스페란토’, ‘이도’ 등이 있다. ‘세계어’라고도 한다.
  • 2)서로 다른 모어를 쓰는 사람들이 의사 전달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공통 언어. 주로 구성원의 모어가 아닌 제3의 언어를 사용한다.
신현규
신현규
성균관대학교 국어학 박사과정. 한국에스페란토청년회 회장, 제102차 세계에스페란토대회 조직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현재 한국에스페란토협회 어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영구·신현규 공저 『초급 에스페란토 회화』(HUINE, 2020)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