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탐구

모든 사전은 특별하다, 당신처럼

이혜민 900KM 대표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

몇 년 전, 〈행복한 사전〉이라는 영화를 꽤 재미있게 봤다. 세상의 모든 사전은 다 모아 놓은 듯 책들이 꽉 들어찬 책장들로 둘러싸인 사전 편찬실을 배경으로, 사전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사랑’과 ‘행복’의 의미를 찾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 인터넷 사전이 종이 사전을 대체해 가는 듯한 시대에, 저런 편찬실은 사라졌겠지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주인공들이 단어를 수집하고 가장 적절한 풀이를 찾아가는 과정과 내가 콘텐츠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맞닿은 부분이 있어 공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2020년 4월, 영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던 세상을 현실에서 만났다.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라는 이름도 낯선 곳. 영화처럼 멋들어진 공간은 아니었지만, 각종 사전과 용례를 찾기 위해 모아 놓은 책들로 가득 찬 자료실, 열심히 사전 원고를 교열하는 편찬원들, 사전이 만들어지고 있는 곳이 분명했다. 게다가 이곳에서 만들고 있는 것은 평범한 사전이 아닌 남북이 함께 만드는 사전이라고 했다. 그것도 무려 15년 전부터 시작된 일이라니. 이런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줄도 몰랐던 나에게 편찬사업회는 장인들이 모여 작품을 완성해 가는 예술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단어를 그러모으고 풀어 헤치고 다시 조합해 가며 세상에 없던 사전을 만드는 사람들. 그들과의 특별한 인연이 시작되었다.

가장 오래된 것과 가장 새로운 것의 ‘컬래버레이션’

편찬사업회에서는 《겨레말큰사전》의 발간을 앞두고 국민들에게 편찬사업 과정과 성과를 소개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데에 골몰하고 있었고 그 결과로 유튜브 채널 개설을 추진했다. 이름하여 ‘겨레말TV’. 편찬사업회의 새 소식을 홍보하는 프로그램 외에도 겨레말을 지키기 위해 다방면에서 힘쓰는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프로그램, 일상생활에서 혼동하기 쉬운 우리말을 알려 주는 프로그램, 《겨레말큰사전》에 수록될 단어들의 용례를 낭독하는 프로그램까지 기획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맡게 된 것은 남측의 국어사전과 북측의 《조선말대사전》을 기본으로 사전마다의 다양한 풀이와 ‘사전’ 그 자체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하는, 〈사전을, 사전하다〉라는 프로그램이었다.

  • “진화하는 사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 “사전이 정답을 ‘찾는’ 도구가 아니라 정답을 ‘생각하게’ 하는 도구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요.”
  • “실제로 사전을 만드는 사람이 요즘 많이 없잖아요. 사전 만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어요.”

윤석정 부장과 홍서현 편찬원을 만나 프로그램의 기획 배경과 의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고민에 빠졌다. 가장 오래된 콘텐츠라 할 수 있는 ‘사전’을 가장 새로운 콘텐츠라 할 만한 ‘유튜브’에서 어떻게 하면 매력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미팅을 끝내고 편찬사업회의 자료실에서 본 다양한 사전들은 각양각색의 표지, 서로 다른 두께만큼이나 다양한 언어와 사회적 배경 속에서 쓰인 것들이었다. 이 안에는 얼마나 많은 단어들이 숨 쉬고 있을까? 또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대체 얼마만큼의 단어를 찾고, 다시 보고, 풀이를 쓰고 고쳤을까? 생각만 해도 아득해지는 시간이 그 사전 속에 있었다. 한편으로 그만큼 사전이라는, 방대하고 깊이가 있는 콘텐츠는, 가볍게 소비되다 사라지는 ‘스낵 컬처(snack culture)’에 익숙해진 요즘 사람들에게 오히려 낯선 콘텐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의 재발견

  • “자막이나 사진보다는 다양한 사전들이 실물로 잘 보였으면 좋겠어요.”

두 번째 미팅에서 내가 한 말이었다. 사실 미리 받은 대본 초안은 라디오 대본에 가까웠다. 하지만 우리 영상이 걸릴 플랫폼은 TV나 라디오가 아닌 유튜브. 가장 시각적이고, 자극적인 콘텐츠들이 매일같이 구독자 수와 조회 수 경쟁을 펼치는 그곳에서, 이런 올곧고 진득한 이야기들이 조금이라도 빛을 보고 살아남으려면 다른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편찬원들이 직접 출연하는 프로그램에서 ‘먹방’이나 게임 방송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부러 전문가의 이미지를 풍기며 시청자들과 거리감을 느끼게 할 필요도 없었다. 적당히 차분한 분위기에서 친근하게 다가가며, ‘빵’ 터지는 웃음은 아니어도 ‘피식’하고 웃게 하거나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약간의 재치가 필요했다.

요즘 유튜브에서는 1980~90년대 흘러간 노래나 TV 프로그램이 ‘탑골공원’이라는 콘셉트로 젊은 층 사이에서 다시 유행하고 있다. 아마도 지금의 젊은 사람들 눈에 그것들이 굉장히 ‘레트로(retro)’한 문화로 다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사전도 그런 매력으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5~6분이라는 짧은 영상 속에서 사전의 깊이를 다 전달하긴 힘들지만 초록 양장 커버에 금박으로 제호가 새겨진 《조선말대사전》, 작고 귀여운 판형에 옛날 서체로 제호가 쓰여진 《소학생조선어문사전》이나 《순전한 우리말 사전》은 유튜브 세대에게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레트로’한 물건임에 틀림없었다. 온라인 사전만 쓰는 세대에겐 심지어 《동아 새국어사전》마저 낯선 물건일 수도 있다. 첫 화가 사전에 대해 소개하는 에피소드인 만큼, 그런 것들을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윤석정 부장과 홍서현 편찬원은 자료실에서 다양한 모양, 색깔, 크기, 주제를 가진 사전들을 골라 내보여 주며 내 의견에 적극적으로 호응해줬다. 대본에서 다양한 사전 중 하나로 언급되는 수첩 형태의 전자사전도 소품으로 꼭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에 가족과 지인에게 수소문하던 찰나, 홍서현 편찬원에게 연락이 왔다. “대표님, 전자사전 찾았어요!” 촬영 당일, 귀중하게 포장된 전자사전을 건네받고 이리저리 눌러보다 “이거 아는 사람 최소 80년대생 아닐까요?”라고 하며 서로 웃음이 터졌는데 이 대화는 고스란히 영상의 자막으로 사용되었다.

〈사전을, 사전하다〉의 숨겨진 매력

그렇게 탄생한 〈사전을, 사전하다〉에는 매 화에 반복적으로 들어가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후킹(hooking) 영상’이다. 오프닝 시그널이 나오기 전에, 본 내용과 연결되는 퀴즈나, 본 내용 중 재밌는 부분만을 따로 편집해 보여주어 궁금증을 유발하는 구성이다.

두 번째는 편찬사업회를 상징하는 남과 북, 재외동포들의 사전들이 어우러진 ‘오프닝 시그널 영상’이다. 프로그램의 내용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면서도 세련된 오프닝을 제작하기 위해 다양한 크기의 사전들을 쌓아도 보고, 하나씩 툭툭 놓아도 보고, 스튜디오 바닥에 놓고 여러 번 훑듯이 촬영도 해보며 완성했다. 그렇게 탄생한 〈사전을, 사전하다〉의 오프닝 시그널 위로는 프로그램 기획안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슬로건이었던 문구가 입혀진다. 브리태니커 사전 어린이판 ‘COLOR’편에서 인용하고 응용한,

  • “사람들은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특별합니다, 당신처럼”
  • “모든 단어는 특별합니다, 당신처럼”

세 번째는 영상이 모두 끝난 뒤 붙는 에필로그 격의 ‘쿠키(cookie) 영상’이다. 마블사에서 만든 영화 시리즈에 단골로 등장해서 본 영화보다 더 기대하게 만드는 그 ‘보너스 영상’처럼, 시청자들을 끝까지 영상에 붙잡아 놓기 위한 장치로 만들어 넣고 있다. 주 영상보다 조금은 긴장감이 풀어진 채로, 어쩌면 별것 아니지만 헤어지기 전 한 마디 툭 던지고 가는 친구처럼 시청자들에게 다가가는 연결점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하여, 〈사전을, 사전하다〉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궁금하다면? 지금 유튜브에서 ‘겨레말TV’를 검색하여 구독하고 그 안에서 〈사전을, 사전하다〉 영상을 찾아 끝까지 시청해 보시길 권한다.

언젠가는 인공지능이 사전을 집필할지도 모른다는 이 시대에, 사전을 만든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사전이라는 존재는 또 어떻게 변화할까? 그리고 이 오래된 콘텐츠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새로운 플랫폼에 기록해 두는 일은 또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나 역시 그 답을 ‘겨레말TV’, 〈사전을, 사전하다〉를 통해 함께 찾아 나가고 싶다. 겨레말

이혜민
이혜민

출판, 디자인, 영상 등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제작하는 콘텐츠 스튜디오 900KM(구백킬로미터)를 운영하고 있다. 기성의 문화에 작은 균열을 내는 일에 관심이 있다. 개개인의 삶이 던지는 사회적 메시지를 발견하고, 삶의 대안적 선택지들을 찾아 나가는 밀레니얼 세대 인터뷰 채널 〈요즘 것들의 사생활〉도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