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창

사전과 독자

- 독자라는 중력, 사전의 무게를 만드는 힘

장경식 한국백과사전연구소 대표

『미디어의 이해』를 쓴 마셜 매클루언은 누가 물을 발견했는지는 모르지만, 물고기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물고기에게는 자신이 헤엄치는 영역을 다른 영역과 달리 인식할 만한 기회가 드물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물 밖에 나와서야 비로소 물이 자신에게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다. 이는 마치 인간이 우주에 나가서야 중력이 자신에게 무엇이었는지를 깨닫는 것과 같다. 중력이 없어도 인간은 존재하지만, 무게를 잴 수는 없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Gravity), 2013〉는 바로 그 중력의 재발견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건져 올린 영화였다.

사전은 ‘무겁다’

사전은 오랫동안 ‘무거운’ 책이었다. 사전이라는 책의 물성(物性) 자체도 대개 다른 책들보다 무거웠지만, 무엇보다도 독자라는 중력이 사전의 무게와 지향을 형성했다. 사전과 백과사전은 오랜 시간 어떤 사회의 구성원이 알아야 할 기본적인 지식과 정보를 담는 가장 기본적인 미디어로 인식되었다. 특히 모든 학교와 도서관은 물론, 학생이 있는 가정과 같은 교육의 현장과 공간에 사전을 갖추어 두는 것은 상식과도 같았다. 중국에서는 사전이나 백과사전과 같은 참조 도서를 ‘공구서(工具書)’라고 하는데, 이는 사전이 건물이나 가구, 기계와 설비를 만드는 데 쓰이는 공구와 같은 쓰임새를 가진 책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쓰임이 사회 안에서 공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전학자나 사전 편찬 전문가들 사이에서 독자의 존재는 마치 중력과 같이 특별히 인지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너무도 익숙한 것이었다.

전기를 다루는 기술자와 나무를 다루는 목수의 도구가 같지 않고, 목수 중에서도 큰 집을 짓는 대목이 쓰는 공구와 소반을 만드는 소목이 쓰는 공구가 같지 않은 것처럼, 사회의 여러 분야가 발달하면 그에 맞는 ‘지식의 도구’가 필요하게 되는 법이다. 필요가 도구를 만들기도 하지만, 도구가 필요를 발명하기도 한다. 시대나 독자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경우에도, 지식과 정보의 전문가였던 사전 편찬자들은 시대와 독자들의 필요를 민감하게 예측하고 그에 걸맞은 지식과 정보를 섬세하게 분별하여 크고 작은 다양한 사전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장인들에게는 대개 좋은 도구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기 마련이다. 이 다양한 사전들의 무게는 그 도구의 가치를 알아보는 독자들의 중력에 의해 계량되었다. 장인들이 무게에 합당한 가격을 치르고 도구를 사들이는 일이 자연스럽게 여겨지고, 좋은 도구를 알아보는 눈과 그것을 보유하고 있는 일 자체가 장인들 자부심의 한 축을 이루는 사회적 풍토가 형성되어 있었던 시절, 그 중력의 시스템은 나름 정교하고 견고하게 유기적인 지식의 생태계를 유지했다.

사전, ‘독자’라는 중력이 사라졌을 때

어느 날, 그 중력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지식과 정보의 통로가 디지털과 인터넷으로 대체되는 시대 흐름 속에서 사전은 일반적인 도서보다 더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검색을 통한 지식과 정보에 대한 접근 가능성의 기하급수적인 확장과 함께 인터넷은 ‘오랜 시간 동안 기획되고, 균형과 일관성을 갖추었으며, 엄격하게 선정되고 편집된, 믿을 만한 지식 정보의 집적물’인 사전이 상대적으로 갖는 한계를 벗어났다. 정제되지 않은 정보들이 다양한 대중적 플랫폼을 통해 제공되면서 어느 순간 인터넷은 사전의 독자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었다. 사전의 생태계를 유지하던 독자의 중력이 사라지자, 사전의 편찬자와 독자 사이에 형성되어 있던 유기적인 관계도 휘발되었다. 오랜 경륜을 통해 다양한 독자의 필요성을 섬세하게 예측하고 그에 대응하던 사전 편찬자들이 보유한 암묵적 지식도, 생태계의 붕괴로 말미암아 퇴장한 그들과 함께 전설 속으로 사라졌다.

사전 생태계가 붕괴된 시대를 맞아 사전과 독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일은 고현학(考現學)에 가까운 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독자의 중력을 실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몸에 익어 굳이 그것을 표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사전 편찬자들의 암묵적 지식의 흔적은 남겨진 것이 별로 없다. 사전학이나 사전편찬학에서 사전의 독자나 사용자에 대한 원론적인 중요성이 간혹 언급되지만, 교과과정 등을 통해 이미 독자의 모델이 정해져 있었던 학습용 사전류를 제외하고는 선행 연구 자료나 실천적인 사례를 찾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독자는 중요하다

중력이 사라진 지금, 비로소 우리는 물에서 나온 물고기와 같이 독자의 존재가 사전 편찬에 있어 어떤 의미였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독자는 사전의 무게가 향하는 방향이다. 이제는 사전 편찬의 고전이 된 『사전 편찬의 원리와 실제』에서 하트만은 사전 편찬의 양상을 기록, 기술, 제시의 세 요소로 구분했다. 그에 의하면 ‘기록’은 사전 편집의 기초를 이루는 어휘의 수집과 저장의 과정, ‘기술’은 특정 사용자 그룹에 제공할 수 있도록 수집된 어휘의 선정과 배열을 하는 과정, ‘제시’는 타겟이 되는 대중의 요구에 맞추어 편집을 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문제는 사전학이나 사전 편찬에 대한 대부분의 논의가 ‘어휘의 수집과 저장’ 및 ‘선정과 배열’에 집중되고 있을 뿐, 그 ‘선정과 배열’의 기준을 만드는 데 반드시 전제해야 할 ‘특정 사용자 그룹’이나 ‘타겟이 되는 대중의 요구’를 꼼꼼히 살펴보는 일에는 인색하다는 점이다.

방향을 잃은 배가 속도를 높이면 암초를 만나기 마련이다. 사전 편찬이 자주 좌초되거나, 결과물이 기대에 못 미치는 까닭은 독자라는 중력을 의식하지 않아 대개 지향점이 구체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원용하면 사전이라는 커뮤니케이션 과정의 송신자는 편찬자이며, 수신자는 독자이다. 수신자에 대한 사전(事前) 정보가 구체적이지 않고, 수신자의 환경과 배경 지식에 대한 고려가 실무적으로 반영되지 않으며, 수신자의 요구를 편찬의 전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인식하지 않는다면,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사전 편찬에 있어 ‘표준 독자’를 설정하는 일이 실무적인 모든 과정에서 긴요하다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지 않거나,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따르는 세부적인 편찬 기준을 만들고 공유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많은 비효율을, 사전 편찬이란 원래 그렇게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여 넘기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로만 야콥슨이 말한 언어의 관어적(關語的) 기능을 실물로 구현한 것이 사전이다. 사전은 한 어휘나 사물을 다른 언어 환경과 배경 지식을 가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학습용 영영사전은 독자의 언어 환경에 따라 모국어 사용자, 제2외국어로서의 영어 학습자, 외국어로서의 영어 학습자에 적합한 것이 따로 개발되어 있다. 같은 표제어라도 풀이말은 독자의 언어 환경에 따라 다른 어휘 수준, 다른 문장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독자라는 중력을 전제하면, 같은 표제어라도 풀이말에 쓰일 어휘 및 문장의 수준과 적용해야 할 언어 규범이 차별성을 가지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겨레말큰사전》 독자의 중력을 상상한다

오랫동안 《겨레말큰사전》의 편찬 과정을 지켜보아 왔다. 반세기 이상 서로 다른 언어 체계 안에 있던 언중들이 쓰는 말을 한 그릇에 담는 일이다. 게다가 편찬 외적 상황 때문에 편찬 과정 자체의 진행조차 순조롭지 않으니, 이처럼 힘든 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안타깝게 느껴질 때가 많다. 《겨레말큰사전》의 ‘공동편찬요강’에는 이 사전이 남북한뿐 아니라 조선족, 고려인 등 해외 동포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지역어를 망라하여 우리 겨레가 오랜 기간에 걸쳐 창조하고 발전시켜 온 민족어 유산을 총집성한 사전으로서, 통일 지향적인 단일 언어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 목표이며, 남북의 현행 어문 규범에 구애받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이 원대한 사업의 중력을 형성하는 독자는 과연 누구일까. 최종적으로는 아마도 통일 한국의 감격적인 첫날을 맞이한 미래의 우리일 것이다. 그러나 그 미래의 우리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언어 규범을 현실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 현재 이 사전의 독자는 미래형이다. 지금의 중력이 없다!

문득, 이 훌륭한 사업의 현실적인 안착을 위해, 지금의 독자를 중력으로 이용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한과 북한의 독자는 같은 언어를 뿌리로 두고 있지만 서로 다른 정치 체제와 언어 환경에서 비롯된, 다른 언어 규범을 사용한다. 자모의 명칭과 순서가 다르며, 두음법칙과 한자어 음가, 사이시옷의 사용, 띄어쓰기, 외래어 표기 등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지금, 여기의 남한과 북한의 독자에게 서로의 언어 규범은 매우 낯설다. ‘남북의 현행 어문 규범에 구애받지 않은 풀이말’은 남한과 북한의 독자에게 더욱 낯설 것이다.

하여, 과도적으로 남한 독자의 언어 환경과 언어 규범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겨레말큰사전》 ‘남한판’과, 북한의 언어 환경과 언어 규범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겨레말큰사전》 ‘북한판’을 상상해 본다. 같은 표제어를 가졌지만 배열이 다른 이 두 사전에 수록된 서로 다른 풀이말은 남북의 독자들이 서로의 언어생활을 비교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서로 다른, 그러나 같은’ 이 두 개의 사전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숙성된 논의를 통해 만들어진 ‘통일된 언어 규범’은 《겨레말큰사전》 ‘통일판’의 편찬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많은 고통의 시간을 보낸 후 언젠가 우리가 맞을 통일의 그날, ‘통일판’의 첫 권은 앞선 두 권과 함께 통일된 한국의 정체성이 그 전과 다르다는 것을 겨레의 안팎에 널리 알리는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다. 겨레말

장경식
장경식
한국백과사전연구소 대표. 한국브리태니커회사에서 편집자와 대표로 일하면서 브리태니커의 다양한 한국어판 백과사전과 출판물을 개발했다. 「뿌리깊은나무-샘이깊은물, 전설로만 떠돌게 할 것이냐?」, 「다중 매체 시대의 백과사전」 등의 글을 썼으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대한 개설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커뮤니케이션북스)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