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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말은 겨레얼 입니다 겨레말큰사전 누리판

겨레말이 만난 사람

분단을 넘어선 우리말의 결합을 이룰 터

부이사장님

글_   윤석정 / 겨레말큰사전 기획홍보부 과장
사진_ 김미경 / 겨레말큰사전 기획홍보부 대리

걸어서라도갈테야
한 문장을 발견해 시작한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
정도상 부이사장은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사단법인 통일맞이(아래 ‘통일맞이’) 사무처장이었다. 2000년 여름 어느 날, 신길동에 있는 통일맞이 옥탑방 사무실에서 문익환 목사의 방북 기록집 『걸어서라도 갈 테야』를 읽고 있었다. 옥탑방은 불볕더위로 달구어져 있었고 러닝셔츠가 푹 젖을 지경이었는데, 문득 한 문장을 발견하고 그는 숨을 죽였다.

‘다음으로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일들을 몇 개 제안해 보았다. 첫째, 남북한 공동국어사전 편찬사업. 긍정적인 답변이었다.’
- 『걸어서라도 갈 테야』, 실천문학사, 1990, 51쪽.

“남북한 공동국어사전 편찬사업” 이 짧은 세 어절의 문장 앞에서 그의 눈이 반짝 빛났고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가 북한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남북한 공동국어사전 편찬사업을 김일성 주석에게 제안했고 김 주석이 동의했던 것.

문 목사는 성직자이기 전 이미 시인이었다. 북간도 용정 명동촌에서 송몽규, 윤동주와 함께 성장했고 셋은 모두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 윤동주가 먼저 감옥에서 짧은 청춘을 마쳤고 곧이어 송몽규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두 친구를 일제에 잃고 괴로워했던 문익환은 히브리어로 된 구약을 공부하며 우리말 실력을 닦아갔다. 문 목사는 휴전협정에 통역장교가 되어 동경에서 판문점을 오가며 분단의 현장을 겪었고 분단된 우리의 현실과 겨레의 상처를 시에 담아냈다. 그래서 문 목사는 누구보다도 우리말의 분단을 가슴 아파했고 남북한의 분단을 넘어선 우리말의 결합을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정 부이사장은 남과 북이 함께 편찬하는 공동국어사전이야말로 최고의 통일맞이 사업이라고 확신했다. 그 후 그는 북의 민족화해협의회(아래 ‘민화협’) 관계자를 만날 때마다 남북한 공동국어사전 편찬사업을 이야기했고 김일성 주석이 남긴 유훈 사업임을 강조했다. 그러다가 그는 2003년 8월 문성근 통일맞이 이사와 함께 평양을 방문해 안경호 6·15공동선언실천 북측위원장에게 공동국어사전 편찬사업을 다시 제안했다. 이처럼 한 문장을 발견해 시작한 남북한 공동국어사전은 2004년 3월 15일 ‘사전편찬의향서’를 체결하면서《겨레말큰사전》으로 사전 명칭을 결정했고 지금까지《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을 이어왔다.

남북공동 겨레말큰사전 편찬의향서4

먼저 부이사장이 된 소회와 각오가 있다면?
무엇보다 무겁게 책임감을 느낀다. 2006년에 편찬사업회가 출범해 2019년이 됐는데 아쉽게도 《겨레말큰사전》을 발간하지 못했다. 첫째로는 부이사장 임기 안에 사전을 편찬하는 게 가장 절실한 바람이다. 향후 공동편찬위원회 회의가 열리면 사전 편찬에 속도를 내기 위해 더 박차를 가하겠다. 둘째로는 편찬사업회를 정관과 규정에 따라 운영하겠다. 편찬사업회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이 아니라 남북교류협력을 꾀하는 공공의 사업이며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직유관단체이다. 공직유관단체에 맞는 합리적·합법적 운영에 더욱 힘쓰겠다. 셋째로는 화합과 신뢰를 바탕으로 편찬사업회를 운영하겠다. 편찬사업회 내부 소통문화를 수평적으로 개선해야 화합과 신뢰를 끌어낼 수 있다. 본인부터 수평적 소통을 위해 노력하겠다.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법(아래 ‘사업회법’)은 유효 기간이 있는데
우리 편찬사업회는 일몰법안(사업회법 종료일 2022년 4월 26일)으로 유지되는 기관이다. 이러한 약점을 임직원이 힘을 합해 하루빨리 개선해야 한다. 편찬사업회는 《겨레말큰사전》을 발간한 이후에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언어(낱말·어휘·문장)는 생로병사를 겪기 때문에 어떤 어휘는 수천 년 동안 절정을 누리고 어떤 어휘는 몇 개월 만에 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전은 발간하는 즉시 미완성 상태에 놓이게 되고 증보·개정 작업을 계속한다. 더욱이 편찬사업회는 《겨레말큰사전》을 발간한 이후 텍스트 중심의 전자사전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담은 전자사전을 개발해야 한다. 남북공동편찬위원회는 남북한의 각기 다른 컴퓨터 운영체제(OS)에서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전자사전을 개발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겨레말큰사전》으로 이름을 지었던 까닭은?
2004년 3월 15일, 중국 연길에서 남측 통일맞이와 북측 민화협이 만나 ‘사전편찬의향서’를 체결했고 남북한 공동국어사전 명칭을 《겨레말큰사전》으로 정했다. 사전의 이름을 짓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했다. 사전을 편찬하려면 어떠한 기준이 필요했다. 남한의 표준어나 북한의 문화어 중 하나를 사전의 기준으로 삼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본인은 보통어 개념으로 기준을 삼기로 했고 의향서를 작성하기 직전까지 사전의 이름을 거듭 고민했다. 문득 우리말을 전부 포괄하는 단어로 ‘겨레말’이 떠올랐고 겨레말을 우리 겨레가 사용하는 보통의 입말이라고 정의했다. 겨레말을 큰사전으로 편찬한다는 의미에서 《겨레말큰사전》이라고 했고 이에 대해 북측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출범과 법인 설립 과정이 궁금하다
북측과 ‘사전편찬의향서’를 체결하고 본인은 국립국어원을 찾아가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국립국어원이 거절해 민간 차원의 남북협력사업으로 사전을 편찬하기로 했다. 2004년 12월 언어학자 이태영 교수와 함께 남측편찬위원회를 구성했고 고은 시인이 상임위원장, 홍윤표 교수가 제1대 남측편찬위원장이었다. 2005년 2월 19일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가 금강산에서 출범했고 2009년 가을까지 매년 4회씩 남북공동의 편찬회의를 진행했다. 2006년 1월 사단법인을 설립하기 전까지 《겨레말큰사전》을 통일맞이의 특별사업으로 추진했다가 편찬사업회는 통일부에게 비영리 사단법인 허가를 받고 통일맞이와 작별했다.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의 가장 큰 난관은?
남북공동편찬회의가 진행되자 예산문제에 봉착했다. 남북협력기금을 받고자 통일부를 설득한 끝에 2006년 1월 사단법인 편찬사업회를 설립했다. 매년 안정적으로 예산을 받기 위해 편찬사업회법을 마련했고 2007년 4월 법안이 통과돼 편찬사업회는 사단법인에서 특수법인(공직유관단체)으로 전환됐다. 법적 근거가 있는 단체가 되어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을 무리 없이 펼쳐왔지만 2009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이 전면 중단됐다. 당시 정부는 북측 편찬위원회에 안부를 묻는 팩스조차 보내지 못하게 했고 박근혜 정부 때 2014~5년에 거쳐 4회 정도 남북공동편찬회의를 가질 수 있었다. 그 후 현재까지 남측과 북측 편찬위원들이 만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편찬사업이 순조롭지 않은 듯하다
지난 정부는 본인에게 상임이사직을 내려놓지 않으면 편찬사업회에 예산을 주지 않겠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예산은 편찬사업회의 존폐와 연결돼 있고 우리 직원들의 생계가 걸린 문제였다.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을 지속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면직을 수용했고 전문위원으로 강등됐다. 편찬사업회 예산을 지키기 위한 희생이어서 오히려 담담했다.

편찬사업회는 부이사장에게 어떤 의미인가
문익환 목사는 생전에 “우리가 광복맞이 사업을 하지 않아서 광복이 오자마자 분단이라는 쓰라린 상처를 얻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통일맞이 사업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본인은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이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통일맞이 사업이라고 확신한다. 문 목사가 그토록 강렬히 원했던 통일맞이 사업에 내가 자그마한 힘을 보탤 수 있어 매우 영광이다.


배고픔이 선사한 문학, 문학이 선사한 현장의 힘

정도상 부이사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운동권 소설가다. 등단한 지 30여 년이 지났고 출간한 책이 무려 30여 권에 이른다. 그가 밝힌 왕성한 작품 활동의 원천은 ‘배고픔’이다. 그가 글을 쓰지 않으면 가정의 생계를 꾸릴 수 없었기 때문에 부지런히 글을 썼고 책을 출간했던 것. 올해는 지난 몇 년간 축적해온 원고가 몇 권의 책이 되어 연달아 나올 예정이다. 그는 매일 전북 익산과 편찬사업회 사이를 기차로 오가면서, 퇴근 후 집에서 원고를 읽고 썼다. 그는 “존재 자체가 작가인지라 생애의 대부분 시간을 원고를 읽고 쓰는 데 소비한다”며 “문학은 생활의 현장, 사건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끝없이 상상하는 힘을 줬다”고 말했다. 이어 “현장을 끝없이 상상하는 힘이 지금까지 나를 지탱하게 해줬다”고 덧붙였다.

인터뷰사진

문학과 인연이 궁금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첫사랑을 만나 시인이 되고 싶었다. 가난한 시절이어서 첫사랑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문득 시가 눈에 띄었고 시야말로 영혼을 담아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형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상에서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그때부터 학업보다 시 공부에 열중했다. 정독도서관, 남산도서관에서 시집과 고전문학, 철학서 등을 탐독했고 시를 필사했다. 생각해보면 어떠한 오기 같은 게 작용했다. 끝까지 읽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고 노트에 정리했다. 첫사랑에게 자랑하고 칭찬받고 싶었다. 그렇게 문학에 빠져서 생활하니 세속의 욕망에서 벗어났고 세상의 모든 게 시시껄렁하게 느껴졌다. 결국 삼수까지 하게 됐다.

그간 통일운동을 전개해왔다.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진 계기는
1983년 군 시절, KBS 이산가족 찾기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봤다. 너무 슬펐고 가슴이 찢어졌다. 이 방송이 본인 영혼의 가장 밑바닥을 흔들어놓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왜 헤어져야 할까? 저토록 사랑하는데 도대체 왜 강제로?” 이산가족에 대해 문학적 질문을 던졌고 역사로 답을 찾아갔다. 군대에서 역사 관련 도서를 읽고 공부했다. 스스로 의식화 교육을 했고 1984년 복학하고 민중문화운동패 ‘말뚝이’를 만들었다. 시위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시위를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후배들과 만든 동아리다.

당시 문학도 병행했는가
1985년 황석영 작가의 <문학에 뜻을 둔 아우에게>라는 산문을 읽고나서 본인은 문학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해 습작 노트를 전부 불태웠다. 산문의 내용처럼 문학을 떠나서 진정으로 살다 보면 어느 날 문학이 찾아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인은 ‘말뚝이’ 활동에만 전념했고 1986년 전두환(제5공화국) 정부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금강산댐 위협설을 터뜨렸고 평화의댐 건설을 제시했다. 당연히 평화의댐 건설 반대 시위를 했는데 감옥에 갇혔다. 감옥의 방송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유미리의 노래 <젊음의 노트>를 선곡해 들려줬다. ‘내 청춘의 빈 노트에 무엇을 써야만 하나’ 그 노래 가사를 매일 듣다 보니 정말 청춘의 빈 노트에 무엇을 써야 할까, 라는 질문이 생겼다. 문학이 다시 본인에게 찾아온 순간이었다. 그 당시 박종철이 죽으면서 감옥에서 추모 단식 농성을 했다. 본인이 겪은 고문, 주변에서 겪은 무수한 고문들을 소설로 쓰겠다고 결심했고 감옥을 나와 1988년에 <친구는 멀리 갔어도>를 발표했다.

1987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 <십오방 이야기>를 발표하면서 데뷔했는데
그렇다. 1987년 봄, 전남대학교에서 공모한 ‘오월문학상’ 소설 부문에 <우리들의 겨울>을 응모해 당선됐다. 같은 해 가을, 친구 아버지가 재직했던 청사출판사에 갔다가 우연히 김형수 시인을 만났다. 그날 저녁 김 시인을 따라 저녁식사 자리에 갔는데 황석영 작가, 이영진 시인 등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일어서는 땅 : '80년 5월 광주항쟁 소설집』에 넣을 소설을 청탁받았다. 마침 소설집에 넣을 대학생 작품이 필요했다면서 본인에게 일주일 안에 원고를 마감할 수 있냐고 물었다. 흔쾌히 청탁을 수락했다. 그렇게 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쓴 소설 <십오방 이야기>가 데뷔 작품이 됐다. 소설집은 1987년 10월 1일에 출간됐다.

부이사장과 소싯적 이야기만 길게 한 듯하다. 그럼에도 지금의 부이사장을 존재하게 한 근간이 아닐까 싶다. 문학인으로서 계획이 궁금하다
먼저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이 무조건 1순위다. 올해는 남북 문학인을 모았던 6·15민족문학인협회를 다시 추스를 계획이고 문익환 목사 방북 30주년을 기념해 도라산역에 시비를 세우려고 한다. 개인적인 목표는 올해 장편소설을 완성시키려고 한다. 소설 제목은 전남도청의 ‘도청’이다. 1980년 5월 27년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진압했을 때 시민군의 마지막 전투 몇 시간을 소설로 담아내려고 한다. 그들은 죽을 줄 알면서 왜 최후까지 싸웠는지 질문하고 싶었다. 특히 내년은 광주항쟁 40주년이다. 본인에게 광주는 문학적 공간이자 문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광주항쟁 40주년에 맞춰 ‘도청’을 집필하면서 본인 나름의 문학적 정리를 하고 싶다.

못 다한 말이 있다면
앞서 강조했듯 《겨레말큰사전》은 발간한 후 증보·개정 작업과 전자사전을 제작해야 한다. 특히 겨레말은 남북의 언어를 결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언어통합을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본인은 통일부, 기획재정부, 국회의원 등을 만나 설득해야 한다. 어느 국회위원은 편찬사업회를 좌파집단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이런 오해는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내년 4월 재보궐선거를 마치면 여야 국회의원들을 만나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또한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의 중요성과 편찬사업 다음에 어떤 일이 발생하고 연결해야 하는지 국민과 소통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겨레말큰사전》은 순수한 학술사업이 아니라 통일맞이 사업이기 때문이다. 올해 서울시의 배려로 시민청에 겨레말큰사전 홍보관을 개관해 대국민 홍보를 진행할 계획이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