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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


이사장 고은



지난 몇 해 동안 우리는 참 많은 것을 겪었습니다. 거장들이 속속 우리의 곁을 떠났고,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과 사고들이 느닷없이 터지곤 했습니다.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도 그 파랑에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집채만한 파도를 견디고 어부들은 먼바다로 항해를 떠납니다. 우리 역시 어휘의 바다를 떠도는 어부들처럼 그 항해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1945년 이후, 언어마저도 분단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남측의 《표준국어대사전》의 언어적 영토는 휴전선의 이남이었고, 북측의 《조선말대사전》의 언어적 영토는 휴전선의 이북이었습니다. 남북 양측의 대표적인 사전이 이럴진대 나머지 작은 사전들이야 어떠했겠습니까. 몇 해 전, 남북작가대회를 추진했던 젊은 작가들이 “작가의 조국은 모국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작가들은 모국어 분단 60년 만에 평양에서 만나 서로의 가슴을 열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 때 모국어의 분단이 새삼스레 아팠습니다.

《겨레말큰사전》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 비로소 우리 민족 전체의 언어를 대상으로 삼은 첫 번째 사전이며, 휴전선 이남의 표준어와 이북의 문화어를 통합하고 극복하는 첫 번째 사전이며, 표준어와 문화어라는 규범을 넘어서서 ‘우리 겨레가 사용하는 보통의 말’ 즉, 겨레말을 대상으로 삼은 첫 번째 사전이며, 남과 북은 물론이고 함경도와 충청도, 전라도와 경상도의 어휘의 차이를 고스란히 담아내어 우리말과 글과 정신의 역사를 다양하게 수록하고 표현하는 첫 번째 사전이기도 합니다.

이제 두어 해만 지나면 모국어 분단 70년이 됩니다. 그 치욕의 세월이 이토록 길어지리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하지만 비현실적이게도 그 세월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우리가 《겨레말큰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은 모국어 분단의 역사에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칠 년 동안 겨레의 어휘창고를 샅샅이 뒤져가며 《겨레말큰사전》을 완성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동안에는 앞만 보고 달려온 셈입니다만 이즈음에서 한 번쯤 호흡을 가다듬고 혹시라도 소홀하게 지나온 부분이 없는가 살펴보기도 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겨레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전이 나올 수 있도록 더욱 매진하겠습니다. 남과 북 해외의 모든 동포 여러분들의 관심과 채찍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감사합니다.

2012년 1월 1일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 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