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주 겨레말큰사전 편찬원
봄나들이도 꽃구경도 마음대로 떠나지 못하는 잔인한 봄이 다시 찾아왔다. 괜히 심통이 나서 지난 주말 화원 앞을 지나다 장미 모종을 사 버렸다. 예쁜 화분에 심어 집에 데려온 후에야 알게 되었는데, 장미가 손이 참 많이 가는 식물 중 하나라고 한다. 이렇게 엉겁결에 사들여 세상을 떠내 보낸 화초들이 벌써 몇인가 싶어, 출퇴근할 때마다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 사이 어느 틈에 노란 꽃망울들이 하나둘 맺히기 시작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게 언제인가 싶게 부쩍 따뜻해진 봄 날씨처럼, 한순간이었다.
우리 생활에서 식물이나 화분은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회복’, 요즘 말로는 ‘힐링(healing)’의 역할을 해 왔다. 공기 정화와 같은 기능으로 건강관리를 보조해 주기도 하고, 회색의 사무실에서 적이나 마음 놓을 곳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감사든 위로든 진심을 전하고 싶은 순간에 우리는 꽃집을 괜히 기웃거리게 된다.
국어사전에서 ‘화분’을 찾아보았다.
| 《표준국어대사전(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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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분1(花盆) 「명사」 꽃을 심어 가꾸는 그릇. ≒꽃분. |
《표준국어대사전(웹)》에서는 ‘화분’의 원어인 한자를 충실히 반영해 풀이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심는 것은 ‘꽃[花]’이고 심어진 곳은 ‘그릇[盆]’이다. ‘화분’은 ‘화병(花甁)’이나 ‘화반(花盤)’과 다르게, 흙을 담고 거기에 화초를 심어 기르는 용도의 용기(容器)를 주로 가리킨다. 즉 장식보다는 재배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 사용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겨레말 말뭉치에서 찾은 아래의 용례들은 ‘화분’이 용기를 가리키는 의미로만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ㄱ.사람들이 말하기를, 엄마는 화초가 잘 되는 사람이라고 한다. … 그래서 잘 아는 사람들은 죽어가는 화분을 엄마에게 맡기거나 선물을 하기도 했었다. 《전경린: 밤의 나선형 계단》
ㄴ.다른 화분들은 제대로 가꾸어 주질 않아 겨울에 얼어 죽었는데 거실에 들여놓은 군자란은 겨울을 잘 버티고 꽃을 피웠다. 《노은주: 우리들에게 남겨진 시간》
위의 용례에서 ‘화분’은 심어 기르기 위한 용기를 가리키지 않고 그 내용물, 즉 심어진 화초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상에서도 ‘화분 키우는 법’, ‘싱싱한 화분’ 등의 용례들이 함께 발견된다. 이처럼 어떤 것을 담는 용기와 내용물을 동일한 단어로 표현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1)
ㄱ.학생들이 서가에서 책을 찾느라 서성거리거나 찾은 책을 들고 책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함정임: 내 남자의 책》
ㄴ.이때 나는 책이라는 것이 얼마나 재미없는 것인가 하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신경림: 다시 책읽기에 재미를 붙이기까지》
첫 번째 용례에서는 형체가 있어 손에 들 수 있는 ‘책’을, 두 번째 용례에서는 평가할 수 있는 내용물로서의 ‘책’을 확인할 수 있다. ‘책’ 이외에도 ‘필름’, ‘음반’과 같이 내용물이 추상적인 정보나 작품에 해당할 때에는 이러한 현상이 흔한 편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내용물의 경우에는 특정한 말이 뒤따라오거나 맥락이 주어져야만 용기의 이름이 그 내용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일 수 있게 된다.
ㄱ.컵을 쏟다, 쟁반을 엎다, 대야가 넘치다
ㄴ.*컵을 마시다, *쟁반이 싱싱하다, *대야를 받아 놓다
첫 번째 용례에서는 용기인 ‘컵’, ‘쟁반’, ‘대야’가 각각 그 안에 담긴 내용물도 함께 가리킨다. 그러나 주로 ‘쏟다’, ‘엎다’, ‘넘치다’처럼 내용물이 용기 밖으로 나오게 됨을 의미할 때에만 자연스럽고 두 번째 용례에서 보듯이 그 내용물을 항상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비해 ‘화분’은 그 내용물인 ‘화초’를 가리키는 데에 대체로 제약이 없다.
덧붙여 우리는 ‘화분’에 꽃이 달려 있는 식물만 심어 기르지 않는다. 물론 과학적으로 꽃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따져볼 수도 있지만,2) 중요한 점은 우리가 화분에 심어서 기를 수 있는 것은 꽃이 달려 있든 없든 식물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화분’의 풀이를 아래와 같이 깁고 더해 보았다.3)
코로나19로 인간의 활동에 많은 제약이 생기면서 오히려 자연환경이 회복되고 있다는 기사가 한동안 화제였다. 내 방 창가에서 누리는 봄나들이, 매일의 꽃구경에 감사하며 너무 갑자기 따뜻해져 버린 봄을 하루라도 더 만끽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