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 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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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장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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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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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 53
사전은 힘이 세다
- 사전을 펴낸다는 일

글 장경식 한국백과사전연구소 대표
사전을 편찬한다는 것
사전은 힘이 세다.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놓기만 해도 새로운 세계를 열 만큼 힘이 세다.
미국의 독립 전쟁이 발발했던 1775년, 노아 웹스터(Noah Webster)라는 소년이 있었다. 16살이었던 웹스터는 예일대학교 신입생이었는데, 그의 대학 생활은 미국 독립 전쟁과 겹쳤고, 식량 부족에 영국군의 침공으로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웹스터는 코네티컷 민병대에서 복무하면서 미국 독립의 의미를 깊이 고민한 끝에, 미국 독립 전쟁이 끝난 1783년 《미국식 철자법 책(The American Spelling Book)》의 첫 권을 펴냈다. 미국이라는 새로 독립한 나라의 지향에 유럽과는 다른 고유의 특성이 있다고 믿었던 그는, 그 차이를 드러내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가 언어라는 것을 깨달았고, 수많은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로 구성된 미국인들의 언어를 수집하면서 철자법을 정리하고 개혁했다. 이 책은 영어에서 미국어를 독립시키기 위해 편찬된 미국 고유 철자법의 첫 번째 책이었다. 당시 영국 영어의 표준을 상징했으며, 미국의 독립운동가들도 참고했던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의 《영어사전(A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을 대체하기 위하여, 노아 웹스터가 미국인의 언어를 바탕으로 새로 편찬한 《메리엄웹스터(Merriam-Webster)》 사전은 지금까지도 미국 영어를 대표하는 영어사전으로 인정받고 있고, 그는 ‘미국 영어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1750년 드니 디드로(Denis Diderot)가 첫 권을 펴낸 《백과전서(L'Encyclope, die)》에 실린 항목들 가운데 많은 내용은 이미 씌어져 있었던 문헌이나 연구 결과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한 서적상이 당시 2권으로 출판되었던 영국의 《체임버스 백과사전(Cyclopaedia, or Universal Dictionary of Arts and Sciences)》의 프랑스어판 번역을 디드로에게 제안했을 때, 디드로는 단순한 번역에 머무르지 말고, 세상의 모든 새로운 지식과 개념을 한 그릇에 담아 보자고 서적상을 설득했다. 디드로는 기존에 존재하던 과학·기술·인문 분야의 논문과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당대 최고 지식인이었던 볼테르·루소·몽테스키외 등 수많은 석학에게 집필을 의뢰했다. 그 결과 출간된 《백과전서》는 중세 이후 학문 체계의 기본이었던 신학·법학·철학·의학에 더하여 그동안 저급하게 여겨졌던 과학과 기술 항목들을 신학과 대등한 위상으로 다룸으로써 당대의 종교적 권력에 대항하는 새로운 ‘담론’의 출현으로 표상되었으며, 드디어 근대 계몽주의를 추동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 두 사례는 ‘사전’이라는 출판물이 어떻게 근대와 근대 시민 국가의 성립에 기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물”이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겠다.
아마도 최후의 백과사전, 브리태니커
사전은 힘이 세다. 한눈에 전체를 보여줄 수 있을 만큼 힘이 세다.
어떤 일을 할 때, 우리는 보통 관념적으로 그 본질을 탐구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 관념을 실제로 눈에 보이게 하는 일이다. 누구라도 지식의 중요성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식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다. 근대 지도의 제작이 신항로 개척 시대를 이끌었다는 점은 정보의 구조적 배열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디드로의 《백과전서》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었던 스코틀랜드 신사협회(Society of Gentlemen in Scotland)의 몇몇 ‘신사’들에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발행의 아이디어를 준 것은 분명하다. 기록에 따르면 앤드류 벨(Andrew Bell)이 이 사업을 주도적으로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쇄소를 소유하고 있던 콜린 맥파쿠하(Colin Macfarquhar)와 함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기획을 주도했고, 자연사 연구자였으며 편집인이었던 윌리엄 스멜리(William Smelie)를 설득해 백과사전의 편집에 참여하게 했다.
윌리엄 스멜리가 1760년에 뉴턴 학회를 설립했던 인물이었으며 1781년에는 에든버러 자연사 박물관의 감독관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세 사람 역시 당대 계몽주의의 내면을 꼼꼼하게 간파하고 있었고 이를 백과사전이라는 장을 통해 실천한 인물들임을 방증해 준다. 어떤 까닭이었든, 에든버러의 이 세 신사가 협력해 만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베이컨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백과사전들 가운데 그 구조와 내면에서 가장 뛰어난 백과사전으로 인정받으면서, 이후 250여 년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전통의 정점을 이룬 판이 바로 15판이다.
1943년 시카고대학 총장이었던 로버트 허친스(Robert M. Hutchins)가 편집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이때부터 20세기 내내 지속된 시카고대학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긴밀한 협력 관계가 시작되었다. 허친스에 이어 편집위원회 위원장이 된 모티머 애들러(Mortimer J. Adler)를 비롯한 시카고학파의 협력을 통해 전면적으로 개정된 제15판이 1974년에 간행되었는데, 제15판은 사전이 모르는 것이 있을 때 찾아보는 책이라는 고정 관념을 근본부터 바꾸었다. 세계 100여 개국 4,000여 명의 필자가 기고한 역대 최대 규모의 제15판은 백과사전의 전통적인 두 가지 효용인 교육과 참조의 목적을 함께 만족시키는 이중 구조를 채택하고, 이 복합적인 지식의 집적물을 효과적으로 검색할 수 있는 두 가지 지식 검색 방식을 제시했다. 제15판은 ‘마이크로피디아(Micropaedia, 소항목사전)’, ‘매크로피디아(Macropaedia, 대항목사전)’, ‘프로피디아(Propaedia, 주제 색인)’, ‘인덱스(Index, 어휘 색인)’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인간이 세상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의 구조를 한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구현한, 아마도 다시 나오기 어려운 지식의 물성 그 자체였다. 21세기 들어 등장한, 집단 지성의 산물이라는 위키피디아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몇몇 항목에서 오류 여부를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려는 시도가 있긴 했지만, 그 누구도 제15판이 이룬 지식의 구조를 뛰어넘는 제안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시대의 반영, 시대의 흔적
사전은 힘이 세다. 그것은 한 시대의 표상을 상징할뿐더러, 그것의 역사적 흔적을 의미할 만큼 힘이 세다.
사전의 편찬은 사전마다 다른 편집 지침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사전의 편집 지침은 해당 사회의 여러 담론을 바탕으로 제정되기 마련이며, 편집 지침에 따라 사전이 다루고 있는 표제어와 풀이말이 달라진다. 즉 사전의 구조뿐 아니라 개별 항목 하나하나는 해당 사회의 담론, 또는 발간 주체가 강조하는 담론에 바탕을 두어 진술된 것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어떤 사회에서 역사의 어떤 순간에 사회적 규칙을 제안하는 진술문의 생산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담론의 실천(discursive practice)’이라고 불렀다. 담론은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가지는 데, 추상적인 의미에서 담론이란 ‘사회적 실천으로 인식되는 언어 사용’이며, 구체적인 의미에서는 ‘특정한 세계관 하에서 경험을 의미화하는 방식’을 지칭한다.
이렇게 생산되는 구성체 가운데 아마도 가장 큰 총체성을 가지는 담론의 덩어리로 사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해방 후 북한으로 간 언어학자 김수경의 주도 아래, 그때까지 한국어 표기의 관행이었던 두음 법칙을 폐기하는 등 새로운 언어 정책을 적용하여 편찬한 북한의 《조선어 소사전》(1956)과 《조선말 사전》(1962)과 같은 사전들은, 같은 한국어라 하더라도 어떻게 서로 다른 언어 규범이 형성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전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미국어의 독립을 선언한 《메리엄웹스터》 사전과도 같아서, 같은 언어라도 국가 담론이 반영되어 새로운 언어 규범이 구조화되는 과정의 역사적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사전은 ‘담론의 구성체’라고 볼 수 있다. 사전은 그 모두가 특정 분야에 대한 편찬 주체의 관점과 견해가 반영된 담론의 구성체였으며, ‘종이책’이라는 물성을 통해 그 담론의 총체와 함께 정체성의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담론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것이 사전의 유용성을 확보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편찬자들은 저마다 고유한 담론 체계를 구성하여 지식을 정제하고 집약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로 각각의 사전은 사회 속에서 다양한 담론을 출현할 수 있게 했고, 이들이 창출한 담론의 다양성은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과 깊이를 독자와 사회에 제공해 왔다. 즉, 사전은 담론의 귀납적 결과물이면서, 또한 연역적으로 담론의 생산과 유통에 기여하는 네트워크의 한 중심이었다. ‘종이책’이라는 사전의 물성은 어느 한때의 역사를 상징하며, 그것의 변함없는 가치를 간직함으로써, 담론 자체를 보전하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AI 시대의 종이사전, 더욱 소중하게 지켜야 할 가치
인공지능은 거대 언어 모델을 학습하여 형성된다. 그 거대 언어 모델은 대개 위키피디아와 같이 인터넷으로 수집 가능한 데이터들로 구성되어 있다. 201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였던 캐나다의 물리학자 도나 스트리클런드(Donna Strickland)의 경우, 노벨상을 받기 전에는 위키피디아에 항목이 존재하지 않았다. 전 세계 위키피디아 편집자의 90% 이상이 남성이라는 점을 환기해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위키피디아는 이처럼 성별·언어·국적·성향 등에 있어 많은 편향과 왜곡의 가능성을 갖고 있음에도, 다양한 사람이 참여하며, 형식적이지만 근거를 제시한다는 가정 아래 많은 사람이 참조 자료로 활용한다. 그리고 이런 모호한 자료가 그대로 인공지능의 학습 데이터에 포함된다. 최근 참여한 몇몇 인공지능 관련 세미나에서 확인한 사실은, 2026년 상반기를 전후하여 인공지능이 지금까지 인류가 만든 거의 모든 데이터를 학습했음에도 응답의 품질은 어느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는다는 정황이었다. 스스로 가치 판단을 하지 못하는 인공지능이 편향과 왜곡이 섞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그럴듯한 답’은 만들어 내지만, ‘믿을 만한 답’을 만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사전은 인공지능이 생성하는 ‘그럴듯 한 답’이 사실에 부합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꼭 필요한, 최선의 ‘신뢰할 만한 자료’이다.
사전은 우리가 일상에서 보기 드문 총체성을 보여주는 매체다. 앞에서 사전마다 갖고 있는 고유한 사상과 논점을 ‘담론’이라고 표현하고, 사전을 그 담론이 총체성을 띠고 드러낸 ‘담론의 구성체’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남북이 공동으로 편찬하고 있는 《겨레말큰사전》이 담보하는 독특한 위상을 인공지능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 이 사전의 바탕에는 반만년의 역사라는 공통점과 함께,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 80년 넘게 이어진 한국 현대사의 단절이 깔려 있다. 2005년 남북은 이 사전의 편찬에 합의한 후, “민족의 언어 유산을 집대성하고 남북의 언어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남과 북이 공동으로 편찬하는 최초의 우리말 사전”이라는 지상의 명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겨레말을 남한과 북한 공동으로 채집·연구하고, 서로 다른 언어 규범에서 나오는 차이를 극복한 공동 편찬 요강을 적용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남북의 뜻풀이 차이와 같은 미시 구조뿐 아니라, 올림말의 선정이나 배열순과 같은 거시 구조도 포함되는데, 이는 이 사전의 가치가 남북통일이라는 미래를 견인하는 데에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지금-여기에서 이 사전의 물성이 가져야 할 고유의 영역을 잘 드러낸다.
달리 말해 《겨레말큰사전》은 현실적으로 당대의 언중이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참고할 실용적인 사전이 아니라, 남북통일이라는 담론을 전제로 한 미래의 규범이 적용된 사전임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겨레말큰사전》의 본질과 총체성을 모니터 속 검색 화면으로는 모두 보여주기 어려운 것은, 그 자체로 사실이다. 그렇다고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을까? 모니터 속의 인공지능은 이 본질을 해체하여, 다른 허튼 것들과 섞은 후, 정체 모를 새로운 것을 ‘그럴듯한 답’으로 제시할 것이다.
사전은 힘이 세다. 식민지를 어엿한 국가로 독립시키고, 분단된 나라를 통일의 길로 이끌 만큼 힘이 세다. 그러나 그 힘은 사전의 힘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유지된다. 사전의 힘이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사전의 힘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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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경식 지음, 임성모·이규수 옮김, 『난민과 국민 사이: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돌베개, 2006, 142쪽.
2)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언어의 감옥에서: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돌베개, 2011, 56쪽.
장경식
한국백과사전연구소 대표. 1994년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완간 이후,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연감》과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온라인》 등을 개발했고, 한국브리태니커회사 대표를 지냈다. 한국사전학회의 창립 회원이며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대한 개설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인공지능 시대의 사전 이야기를 담은 《AI와 사전》, 공저로 《세계의 백과사전》, 《디지털 인문학과 사전》 등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