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 톺아보기
-
- 글쓴이
- 김양진
-
- 작성일
- 2026.10.01
-
- 조회수
- 44
사전을 만든다는 것, 언어를 남긴다는 것

글 김양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요즘은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누구나 스마트폰부터 꺼낸다. 검색창에 단어를 입력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뜻이 나타난다. 인공지능은 예문까지 만들어 준다. 정보 검색의 속도만 놓고 보면 종이사전은 이미 인터넷 사전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왜 종이사전이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종이사전을 직접 만들어 본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이해하고 발견하게 하는 책
사람들은 국어사전이 그저 우리말 단어의 뜻을 모아 놓은 책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편찬자의 눈으로 보면 사전은 단순히 단어와 용례를 모아 놓은 책이 아니라 그 단어를 중심으로 하는 언어(한국어)의 질서를 설계하여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는 언어의 지도이며 한 시대의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해 온 방식을 고스란히 담아낸 지식의 저장소이다. 사전의 가치는 단어의 의미와 용례 하나하나보다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배열되어 있는가를 한눈에 보여 주는 데에 있다.
국어사전 편찬 과정에서 가장 오래 씨름했던 표제어 가운데 하나가 ‘가다’였다. 사람들은 ‘가다’를 누구나 아는 쉬운 단어라고 생각하지만, 사전을 만드는 사람에게 ‘가다’는 가장 어려운 단어 가운데 하나이다.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서 ‘가다’는 자동사의 의미만 스물여덟 가지이고, 타동사의 의미가 일곱 가지이다. 여기에 보조동사로 쓰이는 용법까지 포함하면 모두 서른여섯 가지의 의미와 용법이 설명되어 있고 각 의미에 딸린 파생 의미까지, 모두 마흔두 가지의 의미와 용법이 구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는 연구자의 직관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제 문헌과 말뭉치를 뒤져 각각의 의미를 보여 주는 용례를 찾고, 서로 비슷해 보이는 의미를 문맥에 따라 구분하며, 문법 정보를 덧붙이고, 관련된 관용 표현을 정리해야 한다. 단어에 따라서는 어원과 역사적 용법까지도 하나하나 살펴보아야 하는 경우도 많다. 하나의 뜻을 새로 세울 것인지, 기존 뜻에 포함할 것인지, 용례가 그 의미를 대표할 수 있는지, 문법 구조가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지는지, 우리는 그 하나하나를 두고 오랜 시간 토론을 거듭했다.
뜻풀이의 순서를 바꾸고 용례를 하나하나 교체하고, 품사 정보를 다시 검토하는 일이 출간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가다’라는 단어 하나를 완성하는 데에 며칠이 걸렸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단어 하나만 가지고 며칠, 아니 몇 달을 두고 토론했던 일만은 지금도 생생하다. 한쪽의 국어사전을 채우려면 빨갛게 표시된 수백 쪽의 출력물들을 신물이 나도록 봐야만 했다. 독자가 인터넷 사전에서 검색해서 몇 초 만에 읽는 한 줄의 뜻풀이는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이다.
그러나 더욱 어려운 일은 그다음이었다. 어렵게 정리한 사십여 가지 의미를 어떤 순서로 배열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어디에 둘 것인지, 가장 널리 사용되는 의미를 맨 앞에 세울 것인지, 거기에서 파생된 의미를 어떤 흐름으로 배치할 것인지, 독자가 한눈에 중심 의미와 부차적 의미를 구별할 수 있도록 어떤 체계를 만들 것인지를 두고 수없이 고민했다. 새로운 용례 하나가 등장하면 뜻풀이의 순서도 달라지고 품사 정보도 새롭게 조정되어야만 했다. 사전은 뜻을 나열하는 책이 아니라 의미의 구조를 보여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 스스로 사전이 단순한 정보의 집합체가 아니라 우리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설계도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곤 했다.
바로 여기에 종이사전만이 지닌 장점이 있다. 종이사전에서 독자는 ‘가다’라는 한 표제어 아래 펼쳐진 의미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뜻과 가장 널리 쓰이는 뜻에서 출발하여 비유적 의미로 확장되는 과정, 자동사와 타동사의 관계, 보조동사의 기능, 관련 관용 표현들과 어원과 용례 그리고 상세하게 덧붙은 용법 설명과 때론 그림들까지가 하나의 체계 속에서 연결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읽게 된다. 사전 편찬자가 수많은 시간을 들여 설계한 의미의 질서를 독자가 그대로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겨레말큰사전》의 종이사전도 같은 장점을 지니게 될 것이다.
반면 오늘날의 온라인 상에서의 검색 환경은 매우 효율적이지만 이용 방식이 다르다. 대부분의 이용자는 자신에게 필요한 의미 하나만 확인하고 화면을 닫는다. 검색은 원하는 정보를 빠르게 제공하지만, 단어 전체의 의미 체계와 편찬자가 의도한 배열을 경험하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디지털의 한계라기보다 검색이라는 이용 방식의 특성이다. 종이사전은 단어를 점으로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입체적인 지형지물로 보여 준다. 그래서 종이사전은 단어를 ‘찾게’ 하는 책이 아니라 단어를 ‘이해하고’, ‘발견하게’ 하는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민족의 언어 지도 역할
나는 오랫동안 사전을 만들면서 또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사전은 정보를 제공하는 도구이면서 동시에 한 시대의 언어를 기록하는 총체적 기록물이라는 점이다. 사전 속에는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말을 사용했고, 어떤 뜻으로 이해했으며, 어떤 문화를 공유했는지가 담겨 있다. 그래서 사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소중한 연구 자료가 된다. 오늘날 우리가 오래된 사전을 통해 백 년 전 우리말의 모습을 연구하듯이, 미래의 연구자들도 오늘의 사전을 통해 우리의 언어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겨레말큰사전》의 종이사전 출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 사전은 남과 북을 포함해서 오랜 디아스포라 끝에 전 세계에 자리 잡은 한민족의 언어 경험이, 오랜 세월 각기 다른 환경에서 발전시켜 온 어휘들을 하나의 체계 속에 담아낸 최초의 대규모 '겨레말 사전'이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겨레말의 단어를 모아 놓은 자료집이 아니다. 분단 이후, 혹은 분단 이전의 디아스포라를 통해 남과 북, 중국 연변 지역, 일본, 중앙아시아, 미주와 하와이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각기 다른 언어와의 접촉을 통해 다양한 변화의 길을 걸어온 우리 겨레말의 이력과 현재를 한자리에서 보여 주는 한겨레 언어문화의 총체적 기록이다. 우리말 한 단어 옆에 놓인 그 숱한 경험의 실체들은 한민족의 언어에 세계인의 경험이 담긴 언어 지도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종이사전은 이러한 언어의 전체 모습을 가장 온전한 형태로 보여 줄 수 있다. 편찬자가 설계한 내용 이전에 우리 민족의 국제적으로 확장된 언어 경험의 총체까지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사전은 종이라는 매체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완결된 언어문화의 기념비가 된다. 디지털 데이터는 계속 수정되고 갱신될 수 있다. 그것은 디지털의 장점이다. 그러나 종이사전은 특정한 시점의 연구 성과를 하나의 완성된 형태로 남긴다. 연구자들은 이 책을 인용하고, 우리의 후대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시대의 언어를 읽게 될 것이다. 종이사전은 단순한 정보 저장소가 아니라 시대를 증언하는 기록물인 것이다.
종이사전, 디지털 시대에 남을 문화유산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편찬에 참여했던 나는 스스로 종이사전 시대의 마지막을 경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겨레말큰사전》의 종이사전 출간이 더욱 뜻깊다. 이것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 시대이기에 더욱 필요한 작업이다. 빠른 검색이 일상이 된 시대일수록 언어 전체를 조망하게 하는 사전, 한 시대의 언어를 완결된 모습으로 기록하는 사전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
검색은 필요한 정보를 찾아준다. 그러나 사전은 한 시대의 언어를 기억한다. 검색은 현재를 위해 존재하지만, 종이사전은 미래 세대를 위해 남겨진다. 《겨레말큰사전》이 종이사전으로 출간되는 일의 의의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남과 북이, 전 세계에 흩어진 한민족이 함께 만들어, 겨레말을 하나의 체계로 집대성한 최대의 기록물이기도 하다. 이 기록들을 다음 세대에게 온전한 모습으로 전하기 위해서는 그 실체를 종이사전의 형식으로 남겨야 한다. 기록을 통해 문화를 후대에 전해 온 것은 우리 겨레의 오랜 전통이다. 우리는 『직지』를 만들었고 『팔만대장경』을 찍어 내었으며 『조선왕조실록』을 보유한 민족이다. 오랫동안 국어대사전 편찬에 참여했던 한 사람으로서, 《겨레말큰사전》 종이사전 역시 그러한 기록 문화의 계보 속에서, 우리 시대의 겨레말을 후세에 전하는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여, 오래도록 읽히고 연구되고 사랑받기를 기대한다.
김양진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편찬에 참여했고 한말연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재미있는 한국어 표기법 이야기』, 『추정 이강래-민족어 교육의 한길』(공저), 『질병표현어휘사전』 I~V, 『언어학으로 풀어본 문자의 세계』(공역), 『우리말수첩』, 『국어사전학개론』(공저), 『사전 편찬의 원리와 실제』(공역), 『아빠가 들려주는 우리말 어원이야기』 1~3 등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