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 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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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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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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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 85
겨레말큰사전을 '하루라도 빨리'
발간하면 좋은 이유

글 김진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원
↑ 북측 협의용 《겨레말큰사전》 가제본
“언어는 자격이 아니라 도구다.” 재외동포에게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주제로 강의할 때 꼭 쓰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보자. 일본어가 모어(mother tongue)인 재일동포가 뒤늦게 우리말을 배운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나도 우리말을 쓰는 한민족(Korean)의 일원”이라는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 또는 인정받기 위해서일까? 달리 말해 우리말을 구사할 수 있어야만 ‘한민족 구성원’이 되는 것일까? 이처럼 ‘민족은 같은 언어를 쓰는 집단’이라는 오래된 민족관에 대해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1951~2023)은 이런 생각을 밝힌 적이 있다.
“우리 재일조선인은 일제 식민지배 때문에 일본에 살게 되었고 고국이 해방을 맞이한 후에도 구종주국에 남겨졌다.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문화적 대학살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의 일원으로서 갖춰야 할 자격을 상실했다. 그런 우리들이 조선인이 아니란 말인가? 이 모든 문제는 우리들이 다름 아닌 조선인이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이 모든 아픔이야말로 우리들이 조선인이라는 증거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식민화라는 비극적인 형태로 근대를 경험한 우리, 냉전에 의한 분단체제에 끌려 억지로 갈린 우리, 그 때문에 조선반도의 남북과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이산해 있는 우리. 이런 ‘우리’야말로 그 공통의 역사적 경험 때문에 같은 조선인인 것이다.”1)
요컨대, 민족의 객관적 징표로서 ‘공통의 경험’이 ‘공통의 언어’보다 선차적이고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서경식은 자신을 포함한 재일조선인이 우리말을 익히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이 조선어를 습득하는 것은 단순히 실용적인 문제가 아니라 탈식민지화를 완성하는 지극히 정치적인 과제-그 으뜸은 민족통일이겠지만-이며, 동시에 그와 같은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어려운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동포들과 함께하는 지극히 윤리적인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2)
《겨레말큰사전》을 발간하는 이유
이러한 서경식의 목소리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다 보면,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이 단순히 먼 훗날에도 남북이 ‘같은 언어를 쓰는 같은 민족’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만 진행하는 사업이 아니라는 인식에 자연스레 도달하게 된다. 다시 말해,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은 우리가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의 의의를 좀 더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시각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는 ‘왜’ 《겨레말큰사전》을 편찬하려고 할까? 여전히 ‘언어의 공통성’을 민족의 객관적 징표로 바라보는 이들에게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은 ‘우리말’(서경식의 표현으로는 ‘조선어’)의 분단 또는 이질화가 안타까워 진행하는 사업 또는 민족 동질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은 그리 시급하지 않은 사업(이미 진행된 언어의 분단과 이질화는 어쩔 수 없으니), 심지어는 ‘통일이 된 이후’에 해도 괜찮은 사업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언어를 민족 구성원임을 입증하는 자격이 아니라 ‘공통의 경험’을 한민족 구성원끼리 소통하도록 도와주는 도구로 생각하는 시각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겨레말큰사전》 발간을 통해 한반도 안팎에서 살아가는 한민족이 우리말이라는 도구를 매개로 소통할 가능성을 높이는 일은 ‘한반도 평화 진전’이라는 당면 과제, 그리고 ‘통일’이라는 장기적 과제를 풀어가는 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필요하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겨레말큰사전》 발간은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다는 얘기다.
주지하듯이 지난 몇 년 동안 세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 등 잦은 전쟁으로 지극히 위험해졌다. 동아시아에서도 다카이치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자위대 투입 가능 발언(2025년 11월 7일)을 계기로 중·일 갈등이 빠르게 고조되고 있다. 이 와중에 남과 북은 아무런 소통 없이 ‘완벽히’ 단절된 채 세계사적 격랑에 따로따로 휩쓸려 들어가는 중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북한 병사들은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희생되고 있고, 미국은 남한에 호르무즈 해협 군함 파견을 요구하기 시작했다(2026년 3월 14일).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이란을 지지해 왔던 북한과 미국의 동맹인 남한이 어떤 식으로든 대치하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비극적이다.
평화공존을 위한 소통과 협력
평화학에서 말하는 전문적 개념과 이론에 기대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이 나빴던 이들이 더 이상 관계를 악화하지 않고 함께 무사히 사는 길을 이미 잘 알고 있다. 바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러한 인정의 기반 위에서 공동의 목표를 합의하고 이 목표를 향해 무언가를 꾸준히 함께하는 것이다. 세계가 갈수록 위험해지는 지금 남과 북 모두에게 ‘평화공존’, 그러니까 한반도의 내륙과 하늘과 인근 바다, 세계 각 지역 등에서 충돌하지 않고 지내는 것보다 중요한 공동의 목표가 또 있을까?
남과 북이 이런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가오지 못하게 벽을 쌓을 게 아니라, 철도와 도로, 바닷길을 다시 연결하고 그 길을 원활하게 오가면서, 경제 분야 협력이든 학술·보건의료·스포츠·기후 분야 협력이든 간에 뭐라도 해야 한다. 특히 인류 삶의 무대가 기후 위기로도 빠르게 위험해지는 상황이라 기후 분야 남북 협력은 무엇보다 필수적이고 시급하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본격화했을 때 남과 북이 사용하는 일상 용어의 차이, 특히 남과 북이 각각 쓰는 각 분야 ‘전문 용어’의 차이 등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는 사전 같은 ‘도구’가 없다면, 소통의 시간이 늘어날 뿐 아니라 자칫하다가는 괜한 오해가 일을 그르치는 상황도 발생할 것이다. 반대로 용어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남북이 합의한 공통 용어까지 모아놓은 사전이 이미 우리 손에 주어져 있다면 남과 북의 ‘평화공존을 위한 소통과 협력’은 좀 더 빠르고, 좀 더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요컨대, 통일이라는 장기적 목표를 염두에 두고 “남과 북이 각각 사용하는 말과 글의 통일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법」 제1조) 시작한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은, 사전 편찬을 위한 남과 북의 협력(25차례 공동회의)만으로도 이미 한반도 평화 진전에 즉각적으로 이바지했고, 앞으로 가시적인 편찬 성과가 쌓이면 쌓일수록 경제, 학술, 보건의료, 스포츠, 기후 등 각 분야의 남북 협력 역시 가속화하고 뒷받침할 수 있는 사업이다. 덧붙여, 우리말을 열심히 익혀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향한 여정에 함께 하고 싶지만, ‘우리말의 분단’, 곧 남과 북의 용어 차이 때문에 《표준국어대사전》과 《조선말대사전》을 번갈아 확인해야만 하는 ‘재외동포’에게도 《겨레말큰사전》이 곁에 있다면 당연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에 왜 예산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거나, 통일 이후에 편찬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이들이 곁에 있다면 친절하고 자신 있게 말해도 좋다. 이토록 위험한 세계에서 남과 북이 평화롭게 지내는 데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은 이미 많은 공을 세웠고, 앞으로도 남북 평화공존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그러니 남과 북이 지금보다 더 많은 인원, 더 많은 예산, 더 많은 시간을 투입해 ‘하루라도 빨리’ 《겨레말큰사전》을 발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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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경식 지음, 임성모·이규수 옮김, 『난민과 국민 사이: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돌베개, 2006, 142쪽.
2)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언어의 감옥에서: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돌베개, 2011, 56쪽.
김진환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원. 국민대학교에서 법학과를 나와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교수를 거쳐 국립통일교육원(현 국립평화통일민주교육원) 교수로 10년 동안 재직했다. 『북한위기론: 신화와 냉소를 넘어』, 『동북아시아 열국지 1: 북·미 핵공방의 기원과 전개』, 『동북아시아 열국지 2: 팍스 아메리카나의 뒤안길』, 『북한의 선군정치: 김정은의 선택은?』(공저), 『대한민국 평화기행』(공저), 『섬으로 간 전쟁, 섬에서 만난 평화』 등을 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