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 톺아보기
-
- 글쓴이
- 최경봉
-
- 작성일
- 2026.05.01
-
- 조회수
- 112
다원성을 인정하는 국어정책이
남북 언어 통합 정책의 출발점

글 최경봉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남북 언어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서 근래 알게 된 사실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북한이 2023년 1월 18일에 「평양문화어보호법」을 제정했다는 사실이었다. 남한의 말을 ‘괴뢰말’로 지칭하며 적대시할 뿐만 아니라, 남한의 구체적인 언어 표현을 하나하나 나열하며 사용을 금지하고 처벌 사항을 명기한 발상이 놀라웠다.
더구나 「평양문화어보호법」의 제정은 북한에서 주로 쓰던 ‘조선말’ 대신 ‘국어’를 사용하는 빈도가 높아지는 상황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이 법의 제정을 “북남관계는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라는 북의 선언과 연동 짓는 해석은 자연스러웠다. 다만 해석이 자연스러웠음에도 이를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았다. “미제에 의한 두 개의 조선 책동”이라는 익숙한 선동과 “북남관계는 더 이상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라는 낯선 선언을 연결 지어 이해하는 건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평양문화어보호법」을 「국어기본법」에 대응하는 텍스트로 읽어야 하는 이유
말의 의미는 표면의 말만이 아니라 그 표면을 떠받치는 내면을 함께 들여다볼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동족관계, 동질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라는 선언 또한 그렇다. 낯선 선언의 내면을 들여다볼 때에야 비로소 ‘운명적 관계’를 나타내는 ‘동족, 동질’을 ‘상황적 관계’를 나타내는 ‘적대적’과 대비시킨 불균형이 감지된다. 상황적 관계가 적대적으로 되었다고 ‘동족, 동질’이라는 본질적 관계가 바뀐다는 게 이상한 일 아닌가? 이러한 불균형은 결국 이 선언이 ‘실질적으로 두 국가이면서도 통일을 지향해 왔던 남북의 특수관계’를 비틀어 재구성한 것임을 말해 준다. 「평양문화어보호법」 제정도 그렇다.
적대적인 선언이 곧 단절일 수 없는 분단체제에서,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란 북한의 선언은 우리에게 평화를 정착할 방안을 새롭게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던졌다. 그런 점에서 「평양문화어보호법」의 제정 역시 남북 언어의 통일 혹은 통합 방안을 새롭게 모색해야 하는 과제를 던져준다. 「평양문화어보호법」을 돌출적이고 비정상적인 텍스트로만이 아니라, 「국어기본법」에 대응하는 텍스트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괴뢰 말투를 쓰는 현상을 근원적으로 없애고 비규범적인 언어요소를 배격하며 온 사회에 사회주의적 언어생활 기풍을 확립하여 평양문화어를 보호하고 적극 살려나가는 데 이바지”(제1조)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 「평양문화어보호법」에서, ‘남한 말을 적대시하는 것’과 ‘문화어의 규범성을 높이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평양문화어보호법」은 남한의 「국어기본법」에 대응한다.
「평양문화어보호법」과 「국어기본법」은 같은 민족어를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어문규범을 배타적으로 정립하는 법적 근거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그 배타성에는 차이가 있는데, 「평양문화어보호법」은 남한의 언어 상황을 규범적 판단 대상으로 삼아 적대시한다는 점에서 배타적이지만, 「국어기본법」은 북한의 언어 상황을 규범적 판단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점에서 배타적이다. 「국어기본법」에서 ‘국어’는 ‘대한민국의 공용어로서 한국어’로 규정되고, 북한 말은 ‘남북한 언어 통일 방안’이라는 발전 계획 속에서만 다루어진다.
이처럼 남북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상대를 배제하면서 남북 언어를 관리해 왔다. 배제의 논리가 공고한 상황에서 남북 언어의 통일 혹은 통합을 모색하자는 제안은 현실화되기 어려웠다. 상대를 정책 대상에 포함하여 적대성을 노골화하는 뜨거운 배제론이나 상대를 정책 대상에서 제외하여 무관심을 내면화하는 차가운 배제론이나, 통일과 통합의 맥락에서 보면, 그 책임의 정도가 다르지 않다.
남북의 배타적 의식이 투영된 남북 언어 통일(통합)안의 문제
1961년과 1981년, 북한은 언어정책 기관지를 통해 남북 어문규범의 통일과 통일 사전 편찬 등을 위한 언어학자 공동연구를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제안은 남한의 정치적 변동 상황을 활용하고자 하는 목적의 정치적 제안일 뿐이었다. 북한은 1966년과 1987년에 어문규범을 개정하고 1981년과 1992년 그 규범에 따라 우리말을 집대성한 규범 사전을 편찬하였다.
남한의 제안은 달랐을까? 1991년에 우리 정부는 “남북한의 언어이질화 현상을 극복하고 통일 후 민족 언어생활의 지침이 될 「종합국어통일대사전」”의 편찬을 공식화했지만, “유엔 동시 가입 등을 계기로 남북 교류가 활성화될 경우 북한 및 공산권 한국인 국어학자들도 참여시켜 범민족적 편찬사업으로 발전시킬 계획”(조선일보, 1991.6.2.)은 탈냉전 국면에서 나온 정치적 제안일 뿐이었다. 남한은 1988년 어문규범을 정부안으로 공포했고 1991년 시작한 《표준국어대사전》 편찬사업은 이 규범의 지침을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남북 언어의 통일을 위한 여러 기획이 정치적 이벤트로 소모된 것은 통일을 당위적 목표로 하면서도 각자가 단일한 어문규범을 정립해야 했던 상황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실제 1986년부터 1992년까지 6년에 걸친 논의 끝에 완성한 「로마자 표기법 남북 단일안」은, 자음은 북쪽안을 모음은 남쪽안을 채택해 남북 어문규범 통일의 한 방법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현실의 로마자 표기법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언어 현실과 결합하지 못한 어문규범 통일안의 운명은 이러했다.
「로마자 표기법 남북 단일안」의 운명이 말해주는 바는 명확하다. 남북이 자신의 어문규범을 바꿀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는 한, 남북의 언어 통합 시도는 남북 대결만을 부추길 뿐 언어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국립국어원의 『2016년 남북 언어 의식 조사 보고서』에 나온 ‘남한말과 북한말 통합의 기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는 남북이 구축한 배타적 규범어가 남북 언어 통합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통일’ 대신 ‘통합’이란 말을 선택한 데에서, 국립국어원이 획일성보다는 상호 존중의 관점으로 남북 언어 문제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일반인의 절대다수인 78.2%가 남한말 중심의 통합을 지지하고, ‘새로운 기준’, 즉 중립적 기준으로의 통합을 지지하는 비율은 21%에 그쳤다. 더 흥미로운 건 북한 주민을 접촉해 본 접촉국민이 일반인보다 두 배 넘게(45.5%) ‘새로운 기준’에 대한 선호가 높다는 것이다. 이 결과에서 우리는 남북의 언어 문제를 경험한 사람일수록 남북 어느 한쪽으로의 통합에 문제의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해석에 공감할 때 이런 의문은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접촉국민 중 55%는 왜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 데 부정적이었을까?”, “왜 접촉국민 50%는 남한말을 기준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했을까?”
남북 언어 문제를 경험했음에도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 것에 부정적이었다면, 여기에는 짐작건대 ‘남북 모두에게 낯선 기준’은 결국 모두로부터 배척될 거라는 우려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 우려가 타당한 것이라면,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통합 기준은 남한말뿐이지 않았겠는가. 말은 ‘통합’이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남북 언어 통합 과정은 남북 어느 한쪽의 규범어를 배제해야만 하는 대결의 과정이다.
그런데 설문의 결과를 현실로 받아들이기 전, 이 설문조사가 과연 남북 언어 통합에 대한 언중의 생각을 수렴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는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필자도 이 설문조사를 설계한 연구진의 일원이었음에도, 그 당시 지적하지 못했던 문제는 통합의 기준에 대한 질문이 단일 규범을 전제하고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질문이 단일 규범을 전제한 것이라면, 응답자는 이 틀 안에서 통합 기준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 설문은 응답자들에게 ‘남북 언어의 경쟁을 감수하는 것’과 ‘현실과 괴리된 규범을 감수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만약 남북 언어 통합의 기준으로 제시된 ‘새로운 기준’을 ‘제3의 단일 규범’과 ‘남북 병용 규범’으로 분리해 제시한 후 설문을 했다면 그 결과는 어땠을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응답자 중 상당 비율은 ‘남한말 중심 기준’이나 ‘제3의 단일 규범’ 아닌 ‘남북 병용(倂用) 규범’을 선택했을 것이다. 남북 통합 과정이 남북 대결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다수의 생각이라면, 남북 언어를 병용하는 방안이 다수의 선택을 받으리라 예상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다.
사실 남북의 언어 차이 문제를 단일화가 아니라 각자의 언어적 경험을 존중하는 병용의 방법으로 해결하자는 움직임은 탈냉전 이후 본격화되었고, 그러한 움직임은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을 현실의 일로 만들어낸 동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민족어의 이질화를 막는다는 목표로 시작한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이 남북의 우리말뿐만 아니라 중국, 러시아 등 해외 교포의 우리말을 아우르는 편찬사업으로 확장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모든 겨레말을 공평하게 담아내려는 《겨레말큰사전》은 대립과 경쟁의 구도를 벗어나 남북 언어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길을 미리 보여준다.
《겨레말큰사전》에서 보여준 병용의 방안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겨레말큰사전》이 현실에서 활용될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로마자 표기법 남북 단일안」의 운명에서 볼 수 있듯이,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은 남북 언어 통합을 위한 이상적 시도 혹은 남북 언어 통합을 명분으로 벌인 정치적 이벤트로만 기억될 것이다.
《겨레말큰사전》이 현실에서 활용될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현실의 국어정책이 곧 남북 언어 통합 정책이 되어야 한다. 남북 언어 통합 정책이 될 수 있는 현실의 국어정책은 남북 언어의 병용이 가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국어정책이란 점에서, 다원주의적 국어정책과 상통한다.
다원주의적 국어정책은 하나의 중심언어를 세우고 이에 맞춰 획일적인 언어생활을 하는 게 발전이라는 논리가 시효를 다했음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다원적인 언어 현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국어정책이 전환된다면, 남북 언어 통합의 실현 가능성도 높아진다. 다원적인 언어 현실은 북한의 언어 현실도 아우르는 현실일 테니까.
서울말을 표준어로 한다는 원칙을 포기한다면 우리의 언어생활엔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시효를 다한 규범적 선언의 영향력은 제한적일 테니 우리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언어생활을 할 것이다. 그런데 상징적인 대립 구도에서 만들어진 남북 언어의 구획은 쉽게 무너진다. ‘서울말’이라는 말이 빠짐으로써, ‘서울말’ 대 ‘평양말’의 대립 구도는 와해되고, ‘서울말’을 대체한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말’은 표준어와 문화어를 아우른다. 규범의 유연함이 말의 경계를 무력화할 때 「평양문화어보호법」의 존재 의미도 희미해진다. 유연함은 통합의 필수조건이다.
최경봉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동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어학회 부회장, 민족어문학회 회장, 국립국어원 국어규범정비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한국어학회 회장, 국어심의회 국어규범분과위원, 법제처 법령용어 정비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민족어의 양면-남북의 언어정책과 어문민족주의』, 『한글 연대기』, 『우리말의 탄생-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 『근대국어학의 논리와 계보』, 『한글 민주주의』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