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 톺아보기
-
- 글쓴이
- 고대영
-
- 작성일
- 2022.05.12
-
- 조회수
- 1,682
파리한 돼지 두부 앗는(?) 날
고대영 겨레말큰사전 편찬부장
요즘 둘째가 『읽으면서 바로 써 먹는 어린이』 시리즈에 푹 빠졌다. 그중 속담 편에서는 책을 읽으면서 바로 써먹을 기회를 엿보느라 귀는 쫑긋쫑긋, 입술은 오물오물하며 가족들의 대화에 집중하는 모습이 귀엽고 한편 대견하기도 하다. 그러다가 종종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속담을 찾아내 가족 모두가 놀라기도 했다. 하지만 대개는 누나의 참견에 퉁퉁 부은 얼굴로 날 찾아와 판결을 내주십사 울먹이는 게 일이었다.
한동안 누나와 함께 책에서 읽은 속담과 생활을 잇는 데 골몰하더니 이젠 새로운 속담을 찾아 달라고 보챈다. 그래서 애들과 함께 주제어를 뽑아 해당 낱말이 들어간 속담들을 낚아 올렸다. 아이들과 함께 만든 속담 꿰미에서 속담 하나를 뽑아내 찬찬히 들여다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 ‘파리한 돼지 두부 앗는 날’이라는 속담이 실려 있다. ① 즐기는 음식이라고 염치없이 덤벼 배를 채우는 사람을 비꼬는 말로 쓰거나 ② 무엇을 게걸스럽게 먹으며 좋아하는 경우를 비꼬는 말로 쓰인다고 한다. 아마도 잔뜩 굶주린 돼지가 콩비지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모습에서 유래한 속담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속담 자체가 아니라 ‘앗다’에 있다. ‘두부 앗는 날’이란 어떤 날일까? 《표준국어대사전》을 검색해 보아도 빼앗거나 가로채다 또는 수나 팥 따위의 껍질을 벗기거나 목화의 씨를 빼다, 깎아 내다 등의 뜻으로 쓰이는 ‘앗다1’과 다음에 품이 필요할 때를 위해서 상대방에게 먼저 품일을 해 주다의 뜻으로 쓰이는 ‘앗다2’만 있을 뿐이다. 어느 것도 속담의 ‘두부 앗는 날’의 ‘앗다’인 것 같지 않다. 이 ‘앗다’가 쓰인 다른 속담을 찾아보니 ‘어이딸이 두부 앗듯’이 있다. 무슨 일을 할 때 의견이 잘 맞고 손발이 척척 맞아 쉽게 잘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아마도 이 ‘앗다’는 주로 두부와 어울려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의 답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찾을 수 없다. ‘두부 앗는 날’의 ‘앗다’는 북의 《조선말대사전》의 ‘앗다2’에서 그 쓰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두부나 묵 같은 것을 만든다는 뜻이다. 즉 ‘두부 앗는 날’이란 ‘두부 만드는 날’이란 의미인 것이다.
북에서는 두부나 묵 같은 것을 만들 때 ‘앗다’를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내가 두부를 좋아한다고 밤새워 콩망질을 하여 두부도 앗아 주었다.
《내 고향의 작은 집》(북)
남혁이 어머니는 아픈 몸으로 또 두부를 앗겠다고 망을 돌리다 그만 지쳐 누워버린 모양이였다.
《어머니의 노래》(북)
한편 연변에서도 ‘앗다’의 용법이 아래와 같이 확인된다.
박씨는 두부를 앗아 가지고 말리거우에 외삼촌댁의 제사를 보러 갔다.
《리태수: 조각달 둥근달》(연변)
녹두죽을 쑨다, 두부를 앗는다 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 했다.
《리혜선: 빨간 그림자》(연변)
남에서는 두부를 만든다는 뜻으로 주로 동사 ‘하다’, ‘만들다’ 등이 쓰일 뿐 ‘앗다’가 쓰인 용례를 찾을 수는 없었다. 다만 특이하게 아래와 같이 ‘쑤다’가 쓰인 경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고드름 장아찌 아니랄깨미 간수 없이 두부 쑤네그려, 보면 모를라?
《이문구: 오자룡》
달명이 의붓아버지가 나중 안개 걷을 만하여 삐끔 둘러보고 가긴 했지만, 그것도 여우에 맘이 있어서가 아니라 두부를 쑤려고 소금막의 간수를 푸러 온 거였다.
《이문구: 관촌수필》
처음에는 온종일 맷돌을 돌려가며 직접 두부를 쑤느라 땀을 흘리는 김가를 볼 때마다….
《이시백: 갈보 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