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누리판 2006년 12월

겨레말 좌담

말은 문화의 뼈대이자 핏줄이다. 말은 운명적으로 그 사용자들의 문화와 함께 한다. 이로 인해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은 겨레의 문화적 영토를 복원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 또한 남과 북이 함께 하는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은 남북 문화교류의 많은 영역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한 취지에서 겨레말누리판은 남북 문화교류 사업의 현주소를 점검해보았다. 통일계 인사와 기자, 문화예술계 인사와 함께 ‘남북문화교류의 방향과 전망’을 주제로 좌담을 나누었다. 좀 더 넓은 차원에서 문화교류를 점검함으로써 남북 문화교류의 초석으로서 <겨레말큰사전>의 위치를 더듬어본다.

 

남북문화교류와 문화적 통일의 방향, 그리고 <겨레말큰사전>

 

 

· 때: 2006년 11월 9일 오후 1시
· 장소: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사무실
· 참가자: 박신의(예술위원회 남북및국제교류소위원회 위원장),
· 정현곤(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사무처장)
· 함보현(연합뉴스 기자)
· 진행자 : 이재규(겨레말큰사전 사무처장)

 

이재규 바쁘신 중에 참가해주어 고맙다. 언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겨레말큰사전>은 문화의 근간을 다루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겨레말큰사전>이 이러한 좌담을 준비한 이유이다. 어떤 격식과 형식에 맞추어 진행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눠주길 바란다.
   
함보현 먼저 이 토론회의 주제에 포함되어 있는 ‘문화적 통일’이란 말부터 정의하고 가는 게 좋겠다. 그리고 토론 내용은 좀더 구체적인 지점을 점검하는 것이 실효적일 것 같다.
   
정현곤
  문화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문화 전문가들과 이야기하려니 부끄럽다.
문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밥 먹는 행위부터 시작해서 우리의 일상을 형성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와 예술적 행위처럼 전문가 집단에 의해서 꾸려지는 좁은 의미의 문화가 그것이다.
일단은 그 둘을 모두 고려하는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되어야 할 것 같다.
   
박신의 그 둘이 사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한다. 결국 둘이 함께 갈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나 남북의 교류에 있어서는,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를 다루는 일은 좁은 의미의 문화, 즉 문화예술 전문가 집단의 교류가 선행된 다음의 일이 아닐까 한다.
   
이재규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회의 정도상 상임이사의 말을 빌리자면, 통일은 미래의 문화적 고향으로 가는 것이다. 통일은 우리 미래의 일이지만 고향은 과거의 것이다. 이 시간의 선후를 모두 통합할 수 있는 것이 ‘문화’이다. 문화의 근간인 말의 통일을 이루어내는 작업이 그 뿌리가 될 수 있다면 본격적인 예술교류가 기초를 형성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생활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문화예술 교류의 실태와 문제점, 그리고 전망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사실 문화교류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교류에 비해서 내재적이고 더 본질적이다. 현황이 있을 거고 거기에서 제기되는 여러 문제들이 있을 것이다. 먼저 예술위원회에서 남북문화예술 교류를 책임지고 계시는 박신의 선생께서 문화예술 교류의 실태를 들려달라.
   
박신의
논문 쓸 일도 있고 예술위원회에서 맡은 직책도 있어 문화교류 관련 자료를 많이 찾아보았다.
앞서 말했듯이 남북교류는 당위의 문제이고 반드시 실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 남북문화교류를 지켜보는 입장은 안타까운 면이 많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남북교류의 채널이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남북문화교류가 먼저 물꼬를 튼 개인 또는 단체에 쏠려 있다는 느낌이다. 예술위원회에서 남북문화교류사업 지원을 위해 심의를 하다 보면, 늘 신청하는 단체만 신청하고 있다.
 
 

▲ “남쪽 헌법엔 문화에 관한 규정이 제9조에 한 줄밖에 없다.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정도다. 그러나 북쪽은 문화 관련 내용이 한 장으로 되어 있다. 이런 측면을 감안하면 문화에 대한 이해에서는 북이 훨씬 앞서 있는 것이다.”―박신의

실상 여러 문화예술 단체들이 북과 함께 사업을 하고 싶어 하지만 방법론적으로 쉽지 않은 실정이다. 남북교류 채널이 훨씬 더욱 다채로워져야 할 것 같다.
결국 같은 의미지만 다른 측면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면, 예술위원회가 지원기구로서 단순히 사업 신청을 받아서 지원하는 수동적인 역할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남북 문화예술 교류가 정책적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단순 지원사업으로 멈춰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사업을 진전시키고자 하더라도 남북교류소위원회 자체의 북에 대한 경험과 정보가 미흡한 실정이다. 이 문제도 사실은 그나마 이루어지고 있는 남북문화예술교류에 대한 경험이 확산되지 않는 데서 온다고 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남북교류에 관한 담론이 형성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함보현 아직은 남북교류가 초기 단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소통의 창구가 좁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교류가 질적으로 나쁘다거나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박신의 그렇지 않다. 이제까지의 교류에 따른 경험을 공유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좀 더 발전된 교류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남북교류에 물꼬를 튼 인사들 가운데 북을 수십 차례 갔다 온 사람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로부터 옥류관 냉면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북한 방문 이야기를 마치 무용담 듣듯 들을 뿐이다. 정작 남북교류에서 무엇이 진전되고, 무엇이 충돌하였으며, 그래서 무엇을 얻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너무도 미약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남북교류가 시작된지 한참이 되었지만 2006년에도 북의 주체미술을 겨우 남쪽으로 소개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주체미술은 이미 너무 익숙한 상태이고, 또 그자체로 현대미술 분야에서 매력을 발산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교류의 의미를 주춤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니 이제는 서로의 예술을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진정한 교류를 말할 수준이라는 것이다.
일테면 남측의 예술가들이 북한을 방문하여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현재 외국작가들은 북에 가서 자신의 작업을 할 수 있고, 또 그 결과를 세계적인 전시회에서 발표하고 있다. 솔란 호아스라는 작가는 평양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초대받아 그 기회에 평양사람의 일상을 다루는 비디오 작업을 하여 KBS 방영과 함께 국내 유수의 비엔날레 등에 출품한 적이 있다. 또 올 유월에는 헤이리에서 ‘평양’이라는 제목으로 외국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한 전시회가 있었다. 외국작가들은 나름대로 평양을 바라보고 해석하면서 작품 제작을 할 수 있는데 우리 작가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오히려 우리는 외국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북한을 이해하게 되는데, 일례로 중국 작가가 북의 집단무용을 아주 그로테스크하게 찍은 사진을 통해 문화적 차이와 어떤 단절감 등을 읽어내게 되는 것이다. 이는 북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라 새롭게 접근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라 본다.
   
함보현
  거기에 하나 보태고 싶은 이야기는, 북의 언론보도를 보면서 문화예술교류 참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북에서는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적 요소에 대해서 많은 경계심을 갖고 있고, 그런 침투가 체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었다. 중국이나 외국 작가들이 오히려 북과 또는 북에 가서 작업하는 게 편하다는 말이 타당한 게, 북에서는 남에 대한 어떤 열등감이랄까 두려움이 생각보다 심했다. 과연 문화교류가 활성화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 “전체적인 문화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왔지만 그 근간인 말만큼은 공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진행되어 왔다는 것은 또 다른 희망이 될 수 있다.”― 함보현

 

어느 정도 단계에 가면 활성화되겠지만 지금 이것이 지속될 수 있을까. 가장 큰 문제는 문화예술교류가 비대칭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쪽의 부피와 밀도, 저쪽의 부피와 밀도가 같지 않기 때문에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지속적인 교류를 위한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박신의 지난 5월에 금강산에 다녀 올 기회가 있었다. 그 기회로 북한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개인적으로는 매우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그 가운데 교예단 공연이 그런 마음이 더 드는 구석인데, 실제로 교예단 공연을 관람하는 관람객 숫자가 점점 줄어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여러 번 온 사람들은 그거 보느니 온천에서 찜질이나 하는 게 낫다고 조언을 하기까지 했다. 너무 뻔하다는 것이다. 교예단 공연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은 어려서부터 엄청난 훈련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메마른 기술만이 극대화된 형식주의 미학이지 창의적인 미학으로 보기 어렵다. 입에 칼을 물고, 그 위에 쟁반 얹은 다음 포도주잔을 다시 얹고 하는 기술로 과연 북이 문화적 경쟁력을 말할 수 있을까. 어떠한 삶의 무게와 의미도 담겨있지 않은 형식주의 예술은 결국 볼거리일 뿐인데, 불행히도 남쪽에선 이미 볼거리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 예술에 대해서는 더이상 흥미를 유발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처음엔 만나자는 것이고 나중엔 들여오자는 것이었지만 정치적인 호기심마저 상실한 지금에 와서는 전혀 다른 문제의 것이 되어 있다. 그러니 이제 진짜 교류를 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이런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재규 미술운동을 하는 선배들을 보면, 최근 북이 열려 있는 상황에서도 북을 안 가려고 한다. 예전엔 북의 미술을 상당히 적극적으로 평가했던 이들이지만 지금은 금방 선생님이 말씀하신 이야기를 그대로 한다. 그들의 화풍을 그냥 흔히 하는 말로 ‘이발소 그림’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개별 작가들의 창작 역량은 평가하고 있었다. 저렇게 틀에 박힌 그림만 그리는데도 그들의 기량은 상당히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남북 미술을 볼 때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예술가가 탄생하는 방식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학원을 가거나 학교를 가서 역량이 되면 상업작가가 되거나 학계로 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들은 공장 같은 데서 일하면서 소조활동을 한다. 일을 하면서 예술활동을 하는 것. 물론 영재를 뽑는 다른 방법도 있긴 하지만, 북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다. 문화예술을 향유하는 것도 우리처럼 자본메커니즘 위주의 유통이 아니다. 그들 체제 내에서는, 경향이 단순하긴 하지만 상당히 일상과 밀접해 있다는 것이다. 문학자들도 경제선동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직접 인민들이 생활하는 속으로 들어가서 창작을 한다. 이것이 너무 교조화되고 제도화되어서 탄력이 없긴 하지만 어쨌든 예술이 생활에 밀착되는 과정은 있다.이렇게 남북은 60년 동안 서로 다른 양쪽으로 가버렸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전면적으로 부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현장에서 예술이 인민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북쪽 텍스트를 보는 것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다른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번에 금강산에 결성식을 가진 6·15민족문학인협회도 추진하려는 것이 작품에 대한 교류인 걸로 알고 있다. 작가들이 서로 다른 지역에 가서 취재를 하고 작품에 반영하고 그러자는 것인데 그것이 중요한 듯하다. 물론 그것이 이루어지려면 상당한 부분의 노력과 동의가 이뤄져야 할 부분일 것이다.
   
정현곤 앞서 넓은 의미에서의 문화 이야기를 한 것을 전제한다면, 모든 남북의 교류는 본질적으로 문화교류이다. 지금까지 남북사회문화교류라는 영역에서 진행된 것을 보면 주로 각자가 생산한 것을 상호에게 약간씩 선보인 것이다. 미술전을 비롯해서 상호 남북 공연, 그리고 합동 공연. 미술쪽에서도.
   
박신의 아, 미술전 때 남쪽의 미술작품도 소개되었었나?
   
정현곤 올해 광주 행사에서도 그랬다.
   
박신의 주로 남쪽의 작품은 리얼리즘 계통이 아니었나?
   
정현곤
다양한 작가들이 참가했지만 아직은 그런 게 사실이다. 2002년도에도 북쪽의 미술전을 했었고 남쪽 작품도 전시가 되었다. 이런 교류의 특징은 작가 교류에 기초한 작품 교류가 아니라 행사의 기초에 의한 작품 교류이기 때문에 각자의 사상에 기초한 본격적인 교류는 아니었다. 그러나 공연에 있어서는 한층 진척되었다. 뒤에는 조용필, 윤도현 등 대중가수들도 북에 가서 공연을 하였다. 북은 공연단들이 내려와 계몽가요를 선보이거나 했다. 그런데 북으로 보자면, 예전엔 씨디를 넣어서 공연을 했지만 최근엔 전자악단을 데리고 왔다.    

▲ “이제 나의 작품이 남쪽에만 인정받거나 북쪽에만 인정받는 작품이 아니라 남북이 함께 인정받는 작품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압감이 작가들에게 생겨난다는 건 중요한 문제다.” ―정현곤

이것은 사실 대단한 진전일 수도 있다. 작년에 북에서 <춘향전>을 남에서 <금강>을 공연했던 것은 상당히 노력한 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사에 맞춰지다 보니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밖에는 없었다. 그런데도 여기서 의미 있게 볼 부분이 있다. 남은 대중문화를 해왔지만 북은 끊임없이 6·15와 관련한 창작을 해왔다는 것이다.
문제는, 북은 공연을 해도 노래를 해도 자막으로 가사를 전달한다. 그들이 주고 싶어하는 메시지는 텍스트인 것이다. 결국은 북의 문화를 바탕하는 것은, 예술형식도 있지만, 사실상은 논리구조로 쌓여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끝없이 창작을 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번 6·15 광주 행사에서도 북은 창작곡을 선보였다. 남쪽보다 훨씬 준비를 많이 했다. 물론 행사 그 자체로만 보는 것이다. 보여주기에 급급할지라도 북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의식적인 접근을 취해왔다. 문화예술은 총체적으로 봐야 한다. 북의 그러한 움직임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개성공단을 보면 북의 어떤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특구방식을 통해서 경제를 성장시키려고 한다.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일정하게 차단하지만 그 선 안에서는, 그 특구 안에서는 상당히 정성을 기울인다는 것이다. 외부 문화의 수용방식도 선을 쳐놓고 있지만 그 선 안에서는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며칠전 노동신문 보도 인용을 보니 사회주의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들은 또 하나의 영역에서 하나의 선을 쳐놓고 자본주의 방식을 수용하고 제도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예술가들이 느끼는 남북교류에 있어서도 북이 인간의 삶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예술적 주체들이 직접적인 교류를 엮어나가지는 못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북은 그 선 안에서 상당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북은 새로운 문화에 접근함에 있어서도 무조건적인 경계의식을 갖는다거나 배타적으로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나름의 방식과 범위를 결정해놓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예술교류의 가능성을 짚어낼 수 있는 부분이 상당하다고 본다.

   
박신의 북이 의식적으로 노력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 결과가 문화예술계 전반에 공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많은 예술가들이 남북교류를 하고 싶어 하지만 접근성이나 기반이 없어 답답해하는 실정이다.
   
이재규 접촉할 수 있는 창구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건가?
   
박신의 그렇다. 초기에는 북에 대한 이해를 먼저 가진 단체가 남북교류를 주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거기에서도 특히 문학이 다른 장르에 비해 앞서 갔다고 하겠다. 최근 문학이 남북 작가들의 단일 협회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진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학 이외의 다른 장르의 예술인들에게 어떤 창구로 어떻게 진행시켜갔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다. 문학이 먼저 이루었으니 다른 장르에게도 그 기회가 오면 좋지 않겠는가.
그리고 기왕에 진전된 상황에서 더 나아가면, 소개 차원을 넘어 창작 차원에서의 교류가 진행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북한예술에 대한 접근이 동질성에 대한 기대치로 진행되었다면, 이제는 차이에 대한 구조적인 인식을 토대로 접근해 갔으면 한다는 것이다. 가령 남측의 예술교육과 북측의 예술교육을 비교하는 것도 그런 접근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것은 곧 북축이 이해하는 예술의 역할이 남측과 전혀 다르고, 그래서 교육 자체도 다른 구조를 갖는다고 본다. 그래서 그 다른 구조를 대비하면서 교류가 이루어진다면, 남측으로서는 훨씬 우리가 갖는 내재적인 문제를 반성하고 나름대로 대안을 찾아가도록 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리라 본다.
   
정현곤 실제로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 더 다양한 사람들이 북과 접촉하고 있다. 내가 알기로 문화예술쪽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북에 다녀온 것으로 안다. 다만 사업을 생산하고 있지 않거나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내 판단에 저울도 물이 처음 쌓일 땐 안 움직인다. 물이 좀 차면 한꺼번에 돌아간다. 지금까지 남북 교류 5년은 앞으로 1년의 급격한 변화와 교류량에 빗대어 보면 턱없이 못 미칠 수 있다. 지금 문화예술교류는, 방송쪽에서 움직인 걸 제외한다면 사실 지극히 초보적인 단계다. 특정 인물들에 의한 파편적인 교류가 작용하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인 행사는 특정 세력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나라 양대 예술단체를 넘나들고 있다. 특히 이번 6·15민족문학인협회는 문학계의 거의 모든 인사를 망라하면서 비로소 균형적인 주체가 완성됐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앞으로 어떤 추동력을 발휘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재규 형식적인 교류가 아니라 내용적인 교류로 가야 할 시기라는 데는 여기 계신 분들뿐만 아니라 교류 주체 모두가 대체로 공감하는 것 같다.
   
박신의 교류 내용에서 문화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함께 하는 시민운동’이라는 시민단체에서 일련의 ‘헌법 다시 보기’ 연구의 일환으로 문화 관련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그 기회에 북한 헌법을 보게 되었는데, 아주 큰 차이가 있음에 놀랐다. 남쪽 헌법엔 문화에 관한 규정이 제9조에 한 줄밖에 없다.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는 정도다. 그러나 북쪽은 문화 관련 내용이 한 장으로 되어 있다. 이런 측면을 감안하면 문화에 대한 이해에서는 북이 훨씬 앞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겨레말큰사전>에서 발간하는 잡지를 보니 북의 언어정책의 경우도 언어에 대한 접근과 관점이 훨씬 더 사회적인 것으로서, 훨씬 설득력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에 따른 결과로 주어진 문화예술이 빈곤한 것은 유감이다. 문화예술은 기본적으로 반체제 정신의 산물인데, 그 쪽은 체제 안에서 관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문화를 관리하는 자세를 비롯한 정책적 측면에서의 교류에서도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있다.  
   
정현곤 문화교류를 어떤 영역으로 보든 간에 이런 정도에 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는 이렇게 가야 한다는 건데, 북의 여러 조건을 보니까 사실 본격적인 내용의 교류가 힘들어보인다는 의견인 것 같다. 문화예술은 반체제인데, 북은 ‘교시’가 있고, 민족이라는 개념부터 시작해서 전체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후의 남북문화교류 전망을 어둡게 볼 수밖에 없지 않나?
   
박신의 자본주의 체제에서 예술교육은 개인 창작 중심이다. 개인의 창의적인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방식이다. 늘 새로움을 창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에서 예술은 인민에게 교양을 공유하게 하는 것이 예술의 목표이다. 예술의 역할과 목표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문화예술에서는 새로운 미학을 창조하는 힘이 있다면,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의 문화예술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함께 향유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남쪽은 초중고 예술교육은 입시위주의 교육으로 거의 전멸한 상황이다. 그래서 문화부에서 예술교육을 따로 마련하는 지경이다. 국민이 문화예술을 공유하고 향유할 수 있게 하는 실천의 개념이 미약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는 다를 것이다. 그들의 교육 방식과 그들의 문화예술 관리 방식이 있을 것이다. 그런 교류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체제 우위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다.
   
정현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예술교육과 창작과정과 그것과 시장과의 관계가 북과 남이 상당히 다를 것이다. 이렇게 놓을 때 중간 접점이 필요하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작품을 만들 때는 인정받는 방식이 있다. 가령 이쪽이 시장성이고 저쪽이 체제에 수용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둘 다 어떤 방식으로든 인정받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남이 북을, 북이 남을, 서로를 의식하는 수준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공연이나 작품 등 문화예술의 상호 주고받기가 더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어떤 방송이나 정치적으로 연결된 단위가 만들어낸 문화예술인의 접합이 아니라 주체들끼리의 상호 보기가 이뤄진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내가 문화예술을 생산해낼 때 그 대상에 대한 감각, 인정받는 영역이 달라지는 것이다. 사실 6·15민족문학인협회의 의미가 거기에 있다. 그 협회의 강령은 아시아나 세계까지 넓혀놓았지만, 한반도 내적으로만 보더라도 나의 작품을 보는 사람을 넓혀놓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품을 써야 하는 동기와 가치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재규 그 점은 사실 남측보다는 북측 작가에게 주는 영향이 클 것이다.
   
정현곤 그렇다. 나는 내 쪽으로만 인정받으면 된다고 하고 살아왔지만, 이제 섞고 나눠보면 서로의 작품활동의 동기를 확장시켜줄 것이다. 이제 나의 작품이 남쪽에만 인정받거나 북쪽에만 인정받는 작품이 아니라 남북이 함께 인정받는 작품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압감이 작가들에게 생겨난다는 건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상호 주고받기는 여전히 유효하고 더 진행되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서로의 작품에 대한 가치관이 계속 다르게 유지된다면 그 시간이 좀 더 오래 걸릴 것이다. 당장은 남쪽의 대중문화를 북에서는 그게 뭐야, 하고 볼 것이다. 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날 것이다. 그러나 계속 이렇게만 가진 않을 것이다. 가령, 공통의 기준이 나올 수 있다. 평론가들의 작업이 될 수도 있고 공동 작업이 될 수도 있다. 중간 매개항으로서 그런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소통조차도 힘들어질 것이다.
   
박신의 그 점은 중요하고 의미 있다. 만남을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 그러나 나는 그것을 제도적인 측면에까지 넓혔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재규
  두 분이서 주고받으니 끼어들기 힘들다. (웃음) 남쪽에서 문화예술계뿐만 아니라 정치하는 사람들을 만나도 북을 참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김일성이 무식해서’라는 말을 한다. 그쪽 문화를 저급하게 보는 선입견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이 언어학자와 나눈 담화를 보면, 놀라울 정도로 세부적인 것까지 거론을 한다. 북측 언어정책은 방송에 나와서 아나운서가 발음하는 방식까지 아주 실용적인 부분까지도 이야기를 한다.

▲ “어느 한쪽이 전면적으로 부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현장에서 예술이 인민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북의 텍스트를 보는 것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다른 부분이 있을 것이다.”―이재규

 

사회주의란 게 ‘인간에 대한 기획’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모든 영역에서 섬세하게 진행되어 있다 보니 박신의 선생이 말한 반체제적 예술의 개인적 영역이란 게 불가능한 게 사실이다. 실제로 문화예술은 인민의 공적인 생활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밝고 낙관적인 내용만을 다루고 있다. 어둡고 그늘진 것을 의도적으로 삭제하고 갈등이 있더라도 극복되게 만든다. 그런데 그러한 예술 원리가 그 내부에서 실제 작동하는 것은 또 다를 수 있다. 남쪽에서 북쪽을 바라볼 때 그 체제와 실물에 대한 이해가 동반되어야 한다. 내 생각에 이제 겨우 그 맛보기 과정이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춘향전> 하나만 보고 북의 공연을 다 말할 수 없다. 북에도 다양한 공연 형태가 있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북의 모든 벽에 선전미술만 붙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북 미술의 전체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다른 화첩을 보면 풍경화 중에서도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다. 음악도, 행진곡풍도 있지만 서정적인 노래도 동시에 존재한다. 양쪽이 서로의 사회 체제를 이해하면서도 그 산물에 대해, 서로 충격을 느껴가면서 대면하는 기회가 더 풍부해져야 한다.

   
박신의 결과물만 가지고 교류한 데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주체 미술 자체만 가지고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창작과 향유, 교육 전반에 걸친 구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앞으로 남북 교류는 구조적 접근이 필요하다.
   
함보현 내가 가진 문제의식은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현재 교류 당사자들은 제한되어 있다. 극소수에 해당한다. 그 속에서 서로 충격을 주고받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이 주체들이 서로의 작품을 대중에게 확산시키려는 노력을 얼마나 했는가에 대한 반성이 따라야 한다. 현재 단계는 접촉을 많이 하는 단계이기도 하지만, 차이를 본다는 의미의 관광 차원이 있고 또 돈벌이 차원이 부각되어 왔다. 북의 문화예술에 대해 진지하게 소개시켜주고자 하는 노력은 부족했다고 판단된다. 앞으로 그런 노력을 계속해야 하지 않나 한다.
   
정현곤 구체적인 교류에 대해서 혹시 생각하고 계신 것이 있나.
   
박신의 예술위원회 남북교류 소위원회에서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이제는 예술위원회가 교류의 주체로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문화예술단체에서 그 중심을 맡게 되면 사업 위주로 가게 되고, 실제적인 교류가 힘들어진다. 사업은 행사만 무사히 치르면 끝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교류란 무엇이겠는가. 궁극적으로 차이를 이해하고, 그 차이를 통해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존중을 갖게 되고, 또 그로 인해 자신을 성찰하게 되면서 상호 변화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술위원회는 지원기구지만 현장 중심의 정책도 개발해야 한다. 그런데 남북교류는 현장이 없다. 그래서 예술위원회 소위원회에서 책상 하나만 놓더라도 남북교류지원센터 같은 것을 만들어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정책적인 교류를 위한 기반을 만들자는 것이다. 남북교류는 단순히 문화부와의 문제뿐 아니라 통일부와 외교부와의 관계가 동시에 존재한다. 이 각각의 기관에 대해 채널을 만들고 이것을 통합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재외동포까지 확장되는 일이다. 사할린 등에는 북과 간접적인 교류를 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남북문화교류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정책을 생산하는, 총체적인 채널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교류가 결과물의 공유였다면, 이제는 문화의 힘과 문화의 차이를 공유하게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남쪽이 오히려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법과 제도의 측면 등에서 말이다. 문화예술 향유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남쪽은 자본에 의해 향유가 이뤄지지만 북쪽은 다를 것이다. 요즘 남쪽에서도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렇다면 북쪽 사회는 오히려 우리에게 많은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정현곤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는 교류의 초보적인 단계이기 때문에 상호 생산물을 서로 주고받고 보여주는 데 그쳤다면 이제는 주체들이 문화의 본래적 기능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그러나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남과 북이 그렇게 쉽게 접근한 데에는 공통성이 있다는 거다. 예컨대, 권력에의 종속 혹은 권력에의 집중이라는 측면이 있다. 남쪽은 상업화된 문화권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테고 북쪽은 정치화된 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북은 텍스트 위주의 문화가 구호를 제시해서 선동과 선전, 혁명의 도구로 정치권력에 종사한 다. 대표적으로 <아리랑> 공연 같은 게 있을 것이다. 남쪽도 마찬가지다. 개개인의 도약이 있기는 했지만, 방송이 선도하는 국적 없는 문화로 일시에 나아갔던 것은, 극단화된 상업권력에의 종속이라고 볼 수 있다. 왜 둘은 이렇게 되었느냐. 좀더 문화적으로 향유자들과 소통하며 성장해오지 않고 이렇게 가버렸느냐. 그 문제에는 또 분단이라는 체제가 차분하고 단계적인 성장을 방해하고 서로가 서로의 방식을 극과 극으로 내몬 구조가 있다고 본다. 결국 그런 측면이 현상화된 각자의 현재가 지난 5~6년간 섞여본 것은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상당히 통렬한 반성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심지어 독일도 문화교류협정까지 맺었으면서도 시간이 걸린 것처럼, 남북이 서로 교류하고 앞으로 나아가면 될 거다고 하는 것은 안이한 것이다. 이건 남북의 문화예술 주체들이 내적으로 통렬한 반성을 하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박신의 정말 북과의 교류는 반성이 뒤따라야 한다. 우리 교육도, 정책도 다 북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정현곤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까 더 어려워진다. (웃음)
   
박신의 예전에는 교류 대상을 전통예술로 한정한 바 있다. 그것은 그만큼 동질성의 요소가 많다고 보았고, 또 그래서 민감한 정치적 사안을 피해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통예술도 그 차이가 엄연하다. 남과 북이 북청대사자놀이를 똑같이 보유하고 있지만, 이미 그 변화는 한참 진행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존과 계승의 측면에서도 남과 북이 교류를 해야 할 판이다. 상호 교류는 우월을 따지는 게 아니라 차이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실 문화예술 교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통일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도 맞물려 제기될 수 있을 것 같다.
   
정현곤 결국 말씀하신 내용은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문화주체에 의한 교류, 상업적 흐름에 끌려가지 않고 실질적인 주체들이 교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6·15민족문학인협회의 예를 보면 안다. 문학주체들이, 물론 북은 거기서도 정치적 자장이 작용하겠지만, 주체끼리 만나는 파급력이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동질성 회복이라는 지점에서 문화적 차이를 용인하는 형식으로 전환이 필요하다. 한 개인이 세계와 교감하면서 나오는 것은 다채롭다. 그것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지점까지 가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방치하여 특정 세력이나 자본이 문화교류를 이리 끌고 저리 끌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만일 우리가 분단 체제하에 있지 않다면 문제가 안 된다. 그 속에서 반성하고 평가하면서 나름의 발전을 이뤄낼 수 있겠지만 분단된 상황에서는 어떤 공적 기능이 그것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정부이든 재정이든 전문가 주체가 형성되면서, 예를 들어 사회문화교류위원회가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일회성 사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안정적으로 가기 위해 문화적 목표점의 공유가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 공적 주체의 힘이 들어가야만, 국제정세가 영향을 미치든 남북관계가 어려워지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방송위원회가 그렇다. 방송위원회가 상업적으로 흐르는 각 방송사들을 조정하면서 진행해나가는 것처럼 남북교류도 그런 기능을 당담할 기관이 필요하다.
   
박신의 이런 것도 가능할 것이다. 북에서 고구려 유적 같은 것을 보존하기 힘들다면 남쪽에서 그걸 3D 등을 활용하여 복원하고 다시 그것을 남쪽에서 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 산업적 측면에서도 더 논의할 것이 많을 것이다. 문화콘텐츠진흥원 등 주체를 말하자면 훨씬 더 많아질 수 있다.
   
이재규 논의가 문화산업까지 나가면 감당하기 힘들 것 같다. (웃음) 일단은 문화교류의 주체가 실질적인 교류를 엮어나가야 한다는 것과 어떤 공적 기능이 개입하여 그것을 안정적으로 조절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일단락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함보현 어떤 경우에는 북에 대한 지원 개념이 북을 끝없이 열등화시키는 경우도 본다. 그것을 평등하게 진행하는 것도 매우 중요할 것이다. 문제는 남북 관계도 지속적으로 신뢰를 구축해야 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박신의 그렇다면 협업체계는 어떤가?
   
정현곤 내가 알기로 정부에서는 경협처럼 문화예술쪽에서도 그런 것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북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왜냐면 남쪽에서 정돈된 체계를 가지고 밀고 들어온다면 자기네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들다는 판단이 있었을 것이다. 다양하게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가운데 북에서 선별권을 갖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들이 관리가 되는 것이다. 협업체계는 북에서 반대를 해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는 협업체계 구축이 매우 중요한 문제다. 지금 현재 제도화까지는 안 되어 있지만, 예컨대 방송은 방송3사끼리 협업체계를 갖추고 있고 문화예술 분야는 정부가 비정기적으로라도 전문가들과의 좌담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부분 부분 시간이 지나면서 협업체계 기능을 하고 있는데, 종합적인 기능으로 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방식에 있어서는 조금 더 검토가 필요하다. 민과 관. 아무튼 뭐든지 기구가 생기면 그 속에서 매너리즘이 발생한다. 역시 정부는 지원을 어떻게 충실하게 해줄 수 있는가 하는 데 좀더 충실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현단계로서는 부문별로 협업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본다.
   
이재규 여기가 <겨레말큰사전>이다. (웃음) 이제 그러한 문화교류의 바탕에 있는 겨레말큰사전 이야기로 건너가는 게 좋을 것 같다.
   
함보현 남북 교류가 대체로 비대칭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사람은 해외와 사업을 하면 말이 안 통할 뿐 다른 건 다 통하고, 북과 사업하면 말만 통할 뿐 다른 것은 다 안 통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겨레말큰사전>만큼은 다른 것 같다. 전체적인 문화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왔지만 그 근간인 말만큼은 공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진행되어 왔다는 것은 또 다른 희망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정치적 기류가 불안정해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진행되는 사업일 것이다. 다만, 사상적인 문제가 걸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어휘에 있어서도 그런 것들이 충돌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재규 물론 그런 측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북에는 사회과학적이고 정치적인 어휘가 많다. 올림말 선정과 용례에서도 부딪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지금은 원칙과 선별의 대강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어 부딪치는 부분이 많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는 적잖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양쪽 주체들이 서로 믿음을 가지고 진행하고 있는 만큼, 또 재외동포들이 사용하는 말까지 포괄하는 작업인 만큼 민감한 문제들은 서로가 양해하는 수준에서 해결해나가는 방향을 잡고 있다. 민감한 부분은 서로 배제하거나 아주 건조하게 기술하는 방식으로 가닥이 잡힐 것으로 보인다. 양쪽이 서로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은 일단 뒤로 미룬 다음 최종적으로 합의하자는 이야기도 있다. 갈등이 심한 것은 선배제의 원칙을 취하는 것이다. 누가 싸워서 하나의 방식으로 가자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여러 방법들이 모색 중이다. 현재의 협력 수준과 신뢰 수준이라면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으로 본다.
   
정현곤 언어생활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일상생활이다. 사전 편찬은 일정한 시간 동안 축적된 결과물을 내는 작업이다. 언어 편찬이 고유어의 발굴과 확산에 초점이 맞추어지면 일상어와의 접목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를 수 있다. 최근에는 방송에서도 그런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도 당신이 말을 올바르게 쓰는가 하는 방송이 나온다. 재미삼아 해보지만 거의 다 틀린다. (웃음) 그래서 실제 생활과의 간극을 메꿔주는 역할을 한다면, 물론 지금은 초기 단계지만 앞으로 그것을 사회화시키는 작업이 같이 진행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박신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문화의 근간이다. <겨레말큰사전>이 언어를 통한 작업이지만, 궁극적으로 문화적 파급효과를 염두에 두고 함께 진행되기를 바란다. 한류를 통해 일본인이 한국어를 배우는 경우도 있지만, 문화와 말이 같이 갈 때 효과가 배가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말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을 이 작업을 통해 이뤄낼 수 있으리라 본다. 더불어 이 사전으로 우리 말을 국제적으로 보급하는 데도 일정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겨레말큰사전> 작업이 북측과 정기적으로 접촉하고 또 사전 편찬을 위해 공동 사무소를 둔다면, 그것을 통해 또다른 문화교류의 창구로 활성화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재규 우리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일본 중국 미국 등에 600만이 있는데, 크게 다른 형태로 독자적 발전을 하지 않았다고 본다. 특히 중국 조선족 등 해외에도 교과서는 북쪽 문법에 따르는데, 문화는 이미 남쪽 문화다. 아주 혼란스럽다고 한다. (웃음) 그래서 그쪽 사람들이 우리에게 요구한다. 빨리 남북이 합의해서 통일된 문법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박신의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겨레말큰사전>이 아주 절묘한 홍보 마케팅 전략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한다. 어휘의 차이에서 남북의 차이가 가장 크게 드러날 텐데, 그런 사례들을 적극 알리면서 문화적 파장을 노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차츰 우리 언어의 회복과 함께 문화적 인식도 더불어 상승하리라 기대한다.
   
이재규 역시 말은 문화의 공기란 생각이 든다. 각종 학술회의 등을 통해 그런 역할을 동시에 해나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런 논의가 더 풍부하게 계속되었으면 한다. 장시간 수고하셨다.
겨레말나들이
말에 녹아 있는 삶, 삶에 녹아 있는 말
   - 어로생활 현장 어휘를 조사하는 김규남 선생과 함께 경남 동해안 일대를 가다

 

  지난 11월 2일부터 5일까지, 김규남 선생(전주우석대 교수)은 경남 동해안 일대를 찾았다.
겨레말큰사전에 수록할 현장 어휘를 조사하기 위한 것. 누리판이 김규남 선생을 만났을 때는 3일 오전 10시경, 이미 선생은 포항 구룡포에서부터 감포 앞바다까지 어로생활에서 사용하는 우리말을 조사하기 위해 어촌 일대를 두루 둘러보고 있었다. 처음 약속장소는 감포수협이었으나 마땅한 제보자를 찾지 못해 어느새 포항 가는 길목인 양포 못 미쳐 바다를 끼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계원1리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누리판이 현장에 닿았을 때, 김규남 선생은 계원1리 공동작업장 앞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 안에서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들 서넛과 함께 ‘풍선(風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풍선이 바람만 잘 만나며는 기계선보다 빨랐다 아이가. 백 마력짜리보담도 빨리 나아갔던 기라. 그거 타고 여개서 묵호까정 간 적도 있어!”

▲ 직접 배에 보며, 배와 관련된 우리 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거는 30장짜리 큰배나 나야 되는 기고! 여개는 그마이 큰 배가 없었제!”
오랜만에 옛일을 회고하는 할아버지들은 저마다 풍선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감회에 맞장구를 치며 간간이 감탄사를 섞어주는 것은 조사자의 기본. 그들의 기억 속에 잠겨 있던 깊은 곳까지 동행해야만 지금은 사라져가는 그때의 말들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한참을 무르익고 난 다음에야 김규남 선생은 풍선을 만드는 방법과 풍선의 구조에 대해서 묻기 시작했고, 할아버지들은 더러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실랑이를 벌여가면서 저마다의 기억으로 배 만드는 방법과 배의 구조에 대한 사투리 이름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 계원1리의 구멍가게 앉아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풍선(風船)과 관련된 옛말을 듣고 있다.

“첨에 원삼을 이짝으로 대놓고 누블삼을 대는 기라. 누블삼이 사람으로 말하자면 척추지 척추. 그담에 옆으로 설삼을 대는데, 그건 갈비뼈 한가진 기라. 돛대는 수기로 세우는데, 수기는 요샛말로 삼나무제. 그기 젓가락맹키로 짝짝 뻗어나가는 긴데, 저짝 작년엔가 부산에 어린이 대공원에 가서 봤제. 돛대는 구레자죽에 세워서 남바줄로 묶어올리는데…….”
.   우리말이라고 하기에는 생소한 어휘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돛을 세 개 달면 삼돛대, 두 개 달면 두 돛대. 거기 달린 큰모에니 구판모에니 하는 말들은 그 발음을 정확하게 옮기기도 힘들었다(기실 취재자가 옮기는 어휘는 취재자의 귀에 들어온 발음일 뿐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김규남 선생도 ‘방언은 거의 외래어 수준’이라며 발음기호로 그 하나하나 받아적었다. 배의 구조를 직접 종이에 그려가며 하나하나 따라나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있으면 어디든 내려 제보자를 물색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로생활 어휘를 조사하는 선생은 이미 그때까지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경상남도 남해안 일대까지 일고여덟 곳을 다니며 어로생활에 쓰이는 지역 어휘들을 조사해왔는데, 지역마다 그 어휘가 다르기 때문에 일일이 대조해 가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전라도 일대에선 배를 ‘짓는다’라고 하지만 경상도에선 배를 ‘모은다’고 한다. 산에 있는 나무를 모으는 일에서 유래했을 거라는 설명이다. 부위마다 부르는 이름이 지역마다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쨌든 취재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렇게 주워들은 말도 만만찮은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물을 젓는 것을 그냥 ‘노’라고만 알고 있었던 것이 그 부위마다 부르는 이름이 달랐는데, 이 또한 그 지역에서 부르는 이름이지만, 손잡이 부위는 ‘놀망게’, 몸통에 해당하는 부위는 ‘놀우대’, 물을 저어내는 부위는 ‘놀지시고’라고 했다.  
배를 일일이 짚어가면서 설명하는 어른의 박학다식은 이를 데 없었다. 육십을 넘긴 나이로 20여 년을 수협에서 일했다는 그분은 말솜씨까지 거침없었다. 그러나 조사자에게 필요한 것은 박학다식의 언어가 아니라 이 지역에서 오래 묵어온 순우리말인 것.

“그래도 저런 분들의 제보를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마을마다 입심 센 사람들이 한두 명씩 있는 법인데, 그분들을 도려내려고 하면 괜한 잡음이 생기고 보이지 않는 훼방이 일어 조사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분들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다 듣고 당신께서 이만하면 됐다 싶어서 돌아가실 때까지 최대한 성의 있게 받아줘야 하죠.”

중간중간 구멍가게에 들어 담배를 찾는 손님이 있으면 주인할아버지를 대신해 담배를 찾아꺼내주기도 하고, 무거운 물건을 대신 날라주는 수고도 고스란히 조사자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런 수고는 갑자기 입심을 발휘하며 좌중을 내모는 특별한(?) 마을주민을 상대하는 것에 비하면 수고랄 것도 없다.
한창 사는 이야기를 겯들여 조사를 하는 중 연배가 약간 아래인 듯한 주민이 나타나 배를 직접 보면서 설명을 해야 한다며 우리를 밖으로 이끌었다. 그림을 보면서 설명을 조금 더 듣고 싶다는 조사자의 말에는 아랑곳도 없다.

 

 

▲ 배와 관련된 어휘를 듣기위해 배그림을 미리준비해야 한다.

김규남 선생의 말에는 20년 동안 지역어 조사를 해온 사람의 경험이 배어 있었다. 정말 선생은 한 마디 언짢은 기색도 없이 한 분 한 분의 말을 다 소중하게 경청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절을 그렇게 허비했지만 오히려 이렇게 제보자가 있다는 것만 해도 행복한 일이다. 얼마전엔 부산까지 갔다가 제보자를 찾지 못한 며칠을 허송하고 그냥 돌아온 일도 있었다니, 살아 있는 말을 찾기도 힘든 일일뿐더러, 그 말을 간직하는 사람들도 점점 사라져가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제보자를 찾는 일이 쉬웠던 것은 아니다. 구룡포 아래에 있는 마을을 돌며 풍선에 관한 추가 제보자들을 찾아나섰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이 “풍선 타던 사람들 다 죽어서 없다카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비록 조사에 합당하지 않더라도 누구의 말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그 말들에 얽혀 있는 사연과 삶을 듣는 일이, 죽어가는 말을 되살리는 일이라고 믿는다는 선생의 말이 새삼 가슴을 넘어왔다.

더 난감한 일은 그 다음의 일이다. 젊은 축들이, 보아하니 이 지역 사람들도 아닌 사람들이 나와서 이것저것을 물어보는 품이 달라보였던지, 느닷없이 민원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어른이 다짜고짜 우리를 붙들고 자기 집으로 가서 이야기 좀 하자는 것이었다. 꺼내는 이야기인 즉슨, 이곳이 방파제가 짧아 바람이 불면 파도가 길 위에까지 덮쳐서 나고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가 뛰가다가 마 파도를 맞아갖꼬 엎어지는 걸 몬 본 사램은 그 심정을 모를 끼고마.”

 

▲ 민원(?)에 이끌려 든 어가, 양개이(말똥 성게)를 손질하는 주민들 사이에서도 틈만 나면 어패류에 관한 지역어를 물어본다.

 

▲ 영암3리 한 어가 마당에서 물고기 사진을 펼쳐놓고 일일이 그 부르는 이름을 물어본다.

 

우리는 말을 조사하러 온 사람이라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어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했지만 소용없었다. 김규남 선생은 저 흑산도 어디에선 정말 안타까운 민원이 있었노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어선도 다 운전면허처럼 면허가 있어야 몰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평생 구식의 배만 몰던 늙은 어부가 신식의 기계선에 관련된 말들과 용어들을 다 익혀 시험을 치르기란 싶지 않은 일이다. 배를 몰 줄 모르는 것도 아니나 법이 그런 걸 사람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정책적으로 이런 분들에 대한 배려를 해줄 방법은 없을까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기도 했었다는.

아무튼 처음에는 관공서에서 나온 사람인 줄 알았든지, 아니면 무슨 큰 개발사업을 추진하는 사람들로 알았든지 일일이 하소연을 섞는 일이 나중에사 무용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한 다음에는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어디나 어른들의 삶은 소설책 한 질씩이다. 배 타러 나갔다가 위험했던 이야기며 대처에서 다쳐서 돌아온 이야기 등등. 그 삶의 이야기들이 질펀하게 와닿았지만 그것 때문에 본업을 비껴간 시간이 나절쯤은 그저 아깝게 흘러가기 일쑤였다.

 

▲ 마을 어르신이 회고하는 옛일들을 차분하게 들어주는 것도 제보자의 역할이다.

 

▲ 계원1리에 닿아 어른들이 사용하는 어휘에 대해 묻고 있다.

 

그러나 혹처럼 달려간 취재자조차 지루하고 힘든 과정은 어패류 이름 하나하나의 지역말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선생은 어패류의 사진 500~600장의 뭉치를 꺼내서 일일이 그곳에서 부르는 이름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말을 들려줄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길가든 뉘집 마당이든 가리지 않고 자리를 틀고 앉아 한 장 한 장을 넘겼다. 물고기의 종류가, 그것도 한종류라고만 알고 있었던 물고기들이 그렇게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 ‘돔’만 해도 혹돔, 자리돔, 감성돔, 참돔, 뱅이돔 등 55종이 있었고, 참복, 개복지, 까치복, 가시복 등 복어만 16종, 가재미도 26종이나 되었다.

수소문 끝에 수협 판매계장이 물고기 이름을 훤히 알고 있다는 제보에 따라 저녁 늦게 그 집을 찾아나섰다. 마침 횟집을 경영하는 터라 회 한 접시를 시켜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물고기 이름뿐 아니라 어촌 풍경을 질펀하게 풀어놓는 계장님은 우리에게 고래고기 수육을 맛보게 해주기도 하였다. 이런 대접을 받아보는 것도 처음 있는 일. 하는 수 없이 선생은 하루 일정을 여기서 마무리해야겠다고 어촌 풍경에 귀를 세웠다.

  그렇게 경주 감포에서부터 포항 구룡포 사이의 계원1리와 신창리, 모포리, 영암리를 도는 것으로 이번 조사를 마무리하겠다던 김규남 선생은 다음날 새벽 수협 공판장에서 몇몇 분들을 더 만나볼 계획을 남긴 채 취재자와 헤어졌다.
말을 통해 삶에 닿고 싶으나 일에 쫓겨 요원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말이 취재자의 귀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여러 여건상 어렵겠지만, 제대로 된 조사를 하려면 훨씬 많은 인력을 가동해야 할 거에요. 지금 현장어휘 조사를 2개팀이 각각 2명씩 하고 있는데, 이정도 인력으로는 역부족인 게 사실입니다.”

▲ 말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녹음기와 사진, 기록을 쉬지 않는다

겨레말큰사전편찬사업회는 지역어 조사와 현장 어휘 조사 용역을 의뢰해 총 9개팀을 운영하고 있다. 지역어 조사자들은 각 도별 방언들을 조사하고 현장 어휘 조사자들은 어로생활에 관한 어휘와 동식물에 관한 어휘 등을 조사한다. 그러나 우리 산천의 뼈마디마다 서려 있는 우리 말을 다 찾아내기란 만만찮은 게 사실이다.

물속에 있는 바위 하나하나에도 다 이름을 붙여 불렀다는 한 제보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또한 말이 정신과 감정의 수단이라는 새삼스런 정의를 내리지 않더라도, 우리말 속에 있는 우리네 삶을 쫓아가는 이들의 노고가 우리를 더 풍요롭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만큼은 밤바람만큼이나 선연했다.
 

전문가초청회의
민족의 모든 힘이 결집되어야 할 사업

 

· 일시 : 2006년 11월 30일~12월 1일
· 장소 : 중국 북경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는 11월 30일, 중국 베이징 신세기일항호텔에서 ‘《겨레말큰사전》편찬을 위한 전문가 초청 회의’를 개최하였다. 남과 북의 말뿐 아니라 해외의 우리말까지 아우르는 《겨레말큰사전》의 편찬 목적에 부합하여 이번 회의는 국내 전문가를 비롯한 재중 동포 학자들이 대거 참가하여《겨레말큰사전》의 의의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활발하게 논의가 되었다.
 

총 3부로 나누어 진행된 이 회의는 먼저 이상규 국립국어원장의 기조연설로 시작되었다. 이 원장은 “《겨레말큰사전》의 사업 추진은 민족 공존을 위해 효자 노릇을 할 것이라 굳게 믿는다.”고 말하며 “다양한 지역의 현장 생활 언어를 조사하여 언어와 동등하게 민족의 언어 유산으로서 《겨레말큰사전》은 우리 겨레의 문화 창달에 새로운 전환점이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홍윤표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남측공동위원장은 편찬 사업의 진행 과정과 향후 계획에 대해서 발표하였다.

특히 홍 위원장은 “《겨레말큰사전》은 우리 민족의 모든 힘이 결집되어야 하는 중요한 사업”이라 말하며 “남과 북의 의사결정에서 조정과 화합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라고 강조했다.
총 24명의 국내외 학자가 참여한 이 회의에서는 단지 남과 북이 공동으로 추진하는 사전 편찬 의의를 넘어 기존의 국어사전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다양한 지역어와 현장 어휘를 담아 우리말의 보존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에서 모두가 공감하였다. 국내 학자들은 사이시옷과 두음법칙 등, 아직 남과 북의 통일되지 않은 어문규범과 문헌 및 현장 어휘 조사의 방향에 대해서 각자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특히 재중 동포 학자들은 중국의 동포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말과 실제 생활에서 쓰는 말은 표준어와 문화어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며 《겨레말큰사전》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중국을 포함한 해외에 거주하는 500백만이 넘는 동포들은 우리말은 의사소통에 서로 영향을 받지 않은 통일된 방향으로 하루 속히 발전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홍윤표 위원장은 회의가 끝난 자리에서 전문가 초청 회의는 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성과와 의의가 있었다고 평하며 앞으로 많은 어려움이 산재해 있지만 다양한 방법과 계획을 수립하여 해외에 있는 학자들이 《겨레말큰사전》 편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겨레말사랑방
<말에 얽힌 이야기> 단숟가락과 상할머니

 

  을지로 지하에서 전철을 갈아타기 위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화살표가 찔러놓은 목적지를 쫓아가느라 사물도 사람도 응당 그렇고 그런 배경으로 돌리며……. 이렇게 도시는 가끔 움직임조차 박제시키는 놀라운 기술을 전수한다. 모든 것은 무채색의 나와 나 아닌 것들로 나뉘어 있을 뿐, 잔인한 습관으로 회색의 통로를 통과하고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느닷없는 일이었다. 미처 깨닫지 못하는 순간에 회색의 통로가 색을 입고 타일의 벽이 숨구멍을 열어제끼고 있었으니! 부지불식간, 아니 순식간에 마치 전혀 다른 세계로 빠져든 느낌, 무슨 조화가 일었나, 나도 모르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당혹감이 손바람처럼 스친 뒤에야 그것이 냄새의 마술임을 깨달았고, 그제야 한 귀퉁이 사람들의 발길 아래 보자기를 깔아놓고 앉은 할머니가 보였다. 세상에, 지하철 통로에 펼쳐진 더덕이라니! 더덕향이 땅 속 동굴을 아득한 숲속으로 바꿔놓고 있었던 것이다. 

▲ 신용목 (시인)

돌아앉은 할머니는 행인들과 무관하다는 듯 무엇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들썩이는 팔꿈치의 모양새로 보아 틀림없이 더덕 껍질을 벗길 터. 더덕 껍질이라면, 또 그것이 오래 묵고 실한 것일수록 굳은살처럼 긁어내야 했으니, 나는 행여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단숟가락을 운 좋게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할머니 어깨 너머를 훔쳤다. 앗, 숟가락이었다. 그러나 닳고 닳아 한 귀가 움푹 패여 들어간, 그 단숟가락은 아니었다. 더덕의 껍질을 벗기기 위해 제대로 만든 사각의 숟가락이 손가락과 더덕 사이를 분주히 왕래하고 있었다.
별 연유도 없이 얼마전 나는 ‘단숟가락’이라는 보통명사를 기억해냈다. 꼭히 대라면 그 또한 별 연유 없이 허해지는 가슴을 파내는 한 시절이 흡사 단숟가락질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던 것뿐, 단숟가락에 구구절절한 사연이 녹아 있거나 단숟가락이 아니면 안 되는 앙거머쥔 고집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쪽 빰을 세월에 내준 단숟가락을 통해 가난한 시절의 풍경 속에서 닳아간 여인들의, 처연한 수저질 같은 삶을 잠시 대면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어릴 적만 해도 명절이 가까워지면 사촌들과 수돗가에 둘러앉아 기와 가루를 묻힌 짚으로 놋그릇을 닦는 일이 순서였으니, 물기가 조금만 남아도 곧잘 변색되곤 하던 놋그릇들은 시시한 농담 몇 마디 오가는 사이 반짝반짝한 제기로 다시 태어나곤 했다. 그랬다. 단숟가락이라면, 사실 단단하여 도무지 닳을 줄을 모르는 쇠숟가락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단숟가락이라면, 무언가 긁어낸 만큼 자신도 닳아야 하므로 약간은 누런빛을 띤 놋숟가락이라야 이름값에 걸맞은 모양새를 할 수 있었다.
그 단숟가락은 늘 상할머니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져 있었다. 상할머니라! 내 고향집은 소백산맥이 덕유산을 세워놓고 지긋이 제 살을 흘려놓은 경남 거창의 산골이었는데, 여남은 개 지붕을 거느린 마을에서 유일하게 4대가 함께 사는 집이었고 대를 걸러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니 어린 자손에겐 꼭 할아버지가 둘이든 할머니가 둘이든 했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할머니가 두 분이셨다. 조모인 할머니와 증조모인 상할머니. 우린 증조할머니를 상할머니라고 불렀다.
한 집에 여자가 셋. 윗사람으로 봐서는 며느리가 둘이고 아랫사람으로 봐서는 시어머니가 둘인 셈인데, 있는 집이건 없는 집이건 그런 집안은 정지간, 곧 부엌이 권력투쟁의 핵심이었으니 늙어가는 여자들의 서열은 알게모르게 엄했다. 가족 중심의 노동집약형 영농을 표방했던 우리의 농업은 젊은 여자들을 논으로 들로 몰았고, 집안일의 대강은 상할머니의 손을 거쳤다. 그렇다고 그것이 부엌노동 자체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었다. 들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상할머니에게 저녁은 어짤까예, 하고 물었고, 상할머니는 바가지에 감자 끌거 놨다 국 낄이라, 하고는 방문을 닫았다.
그렇게 어머니가 들일로 집안일로 정신없을 때 육아의 몫은 상할머니 차지였다. 우리는 상할머니 가슴을 만지며 자랐다. 학교에서 돌아온 뒤에도 책보따리를 마루에 던지자마자 상할머니의 가슴부터 더듬었으며 겨울 눈밭을 지치다 방으로 뛰어들어서도 상할머니의 옷깃부터 파고들었다. 아, 상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형제들은 할머니의 젖가슴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였는데, 막내인 관계로 알력의 하단을 쥐고 밀려났던 나는 잘 익은 곶감을 볼 때나 말랑한 젤리를 만질 때면 곧잘 형들한테 빼앗겼던 상할머니의 젖가슴을 떠올리곤 한다.
우리가 마당에서 노닥거리는 사이 상할머니는 수도펌프 옆에 쪼그려 앉아 늘 무언가를 긁고 있었다. 무우일 때도 있었고 감자일 때도 있었다. 그 시절도 칼이 있었는데, 당근도 고구마도, 심지어 호박까지도 죄다 단숟가락으로 껍질을 벗겨낸 건 왜였을까. 얼마전 고향을 찾은 나는 무심한 듯 어머니에게 혹시 아직도 단숟가락이 있느냐고 건넸다. 요즘은 긁지를 않는데, 뭔 단숟가락이 있겠냐며, 한 마디를 흘리고 마셨다. “지금 같으마 귀찮애서라도 확 빚어뿔고 말지. 그땐 살점 한 점이라도 떨어질까 봐 겁난 기라, 상구 박박 안 끌것나. 식구나 한둘이가. 묵을만치 끍고나마는 손바닥하고 손가락하고 다 얼얼한 기…….”
내가 중학생이 될 무렵부터 상할머니는 수돗가에 앉는 일을 그만두셨다. 안방을 벗어나는 일도 드물었지만 단숟가락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마루 한켠이나 펌프질 우물 턱 위에 놓여졌던 단숟가락은 착한 심복처럼 상할머니를 따라 안방으로 들었다. 이제 사과를 올려도 배를 올려도 상할머니는 단숟가락으로 긁어드셨다. 젊을 땐 아까워서 쥐고 늙어선 이가 없어 쥐었던 단숟가락. 상할머니가 걸어왔던 길들이 고스란히 상할머니의 얼굴에 들어가 앉을 즈음, 상할머니는 사흘을 누운 뒤 가셨다. 형과 내가 상할머니의 옷가지를 태울 때, 불행히도 단숟가락은 함께 보내지 못했다. 그땐 상할머니와 단숟가락의 연을 깨닫지도 못했으므로, 후로 단숟가락도 짝 잃은 얼굴처럼 어딘가를 떠돌다 사라졌고 이내 잊혀졌다.
가난의 짐은 누가 다 지고 갔는가. 색색의 셀로판지를 갈아끼우는 네온들의 뒤편에는 다닥다닥 얇은 지붕을 나눠가진 이들의 짐짝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서울이란 곳에서 겨우 누울 방 한 칸 얻은 주제지만, 내 삶의 무늬가 그들을 대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떤 부채감 같은 것을 느낀다. 그것은 사회학적 자의식이라기보다는 한 가난에 대한 끈질긴 기억의 교차에 따른 것일 터이다. 그 속에 아직도 단숟가락을 쥔 상할머니가 앉아 있을 것 같은. 그리고 을지로 환승 통로에서 더덕을 긁고 있는 할머니를 보았다.


<남북의 언어> 내가 만난 북의 말, 북의 음식

 

  '6.15 민족문학인협회 결성식' 기념 연회장. 옆자리에 앉은 북측 사람(행사요원 혹은 안내원)에게 이름을 물었다.
"김종수입니다."
"무슨 종자를 쓰십니까?"
"바를 종자입니다."
"아…. 바를 정(正자)를 쓰시는군요."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고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저희는 '정'이 아니라 '종'자를 쓰시는 줄 알았네요. 북측에서는 '어'를 '오'에 가깝게 발음하시니까요."
그가 반론을 편다.

▲ 이경희(중앙일보 기자)

"남측에서는 '오'를 '오'라고 발음하고, '오'를 '오'라고 발음하지 않으십니까. 거 참 이상합니다."
다시 한번 웃음보가 터졌다. '어'를 말하든, '오'를 말하든 남측 사람들 귀엔 모두 '오'로 들리니 말이다. 
이렇게 같은 언어를 쓰는 남과 북이 만날 때에도 머릿속에서 자동번역기를 돌려야 한다. 금강산이건 평양이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들어가는 순간 낯선 단어 및 발음과 툭툭 마주치기 때문이다.

자, 글을 지금까지 읽으면서 어색한 단어를 발견하셨는가. '북측'과 '남측'이란 단어, 익숙하신가. 우리는 흔히 '북한' '남한'이란 말로 저들과 우리를 나타낸다. 그러나 북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북한'이나 '북조선'이란 말은 잘 쓰지 않는다. '북한'이라기엔 '한국'을 기준으로 두니 너무 남에 치우치고, '북조선'이라기엔 반대로 북에 너무 치우친다. 게다가 남과 북은 결코 두 나라가 아니므로 '북측'과 '남측' 혹은 '북쪽'과 '남쪽'이라 지칭해야 한다는 게 저들과 우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 화법이다. 북쪽 땅을 밟은 뒤 금강산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관광조장(가이드)'이 "북한이 아닌 북측"이라며 신신당부했다(관광조장은 현대아산에서 파견한 남측 사람이었다).

 

방북 이튿날, 등산로 입구의 음식점에서 몇몇 사람들이 쇠고기 꼬치 안주에다 막걸리 한잔을 걸쳤다. 고기 맛이 좋아 '접대원(종업원)'에게 물었다.
"한우인가요, 수입 소인가요?"
"북측 소입니다."
구룡폭포로 향하는 등산길. 남측 기업인 현대 아산이 관리하는 관광지답게 '위생실(화장실, W.C)'이란 친절한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소변 1$, 대변 2$'란 요금 안내도 적혀 있다.
하산한 뒤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고, 연회 자리에서 비로소 북측 문인들과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금강산 문학의 밤' 행사 때 '우리의 항로'란 시를 낭송한 김성칠 시인과 합석했다.
"처음엔 한라산을 갖고 슬픈 시를 썼는데, '동무, 좋은 날 좋은 이야기만 해야지 눈물을 흘리면 쓰나'라고들 해서 급하게 새로 썼단 말입니다. 그래서 시를 다 외우지 못해 보고 읽었는데, 막상 무대에서 읽으려고 하니 숨 고르기가 쉽지 않더란 말입니다."
우리 표현으로는 '호흡 조절'쯤에 해당할까. 북측 시인은 '숨 고르기'란 표현을 자연스럽게 썼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식탁에 놓인 각종 음식에 눈길이 간다. 사실 이번 금강산 방문에서보다 지난해 조용필 평양 공연을 취재하면서 순수한 북측 음식과 언어를 더 많이 접했다. 그 기억을 더듬어 본다.

 

우선 음료수들. '맥주' '소주' 등의 술 이름은 남측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만 소주는 우리의 안동소주처럼 높은 도수의 술을 가리킨다. 음료수 이름은 완전히 다르다. 달짝지근한 음료수에는 '단물'이란 이름이 붙는다. '배 주스'는 '배 단물'이라고 쓰는 식이다. 다만 남측의 100% 과일 주스를 상상해선 안 된다. 배 향기가 나는 설탕물맛이랄까. '딸기 단물'은 추억의 '딸기 쭈쭈바'를 녹인 듯한 맛이다. 북측에도 콜라와 사이다가 있다. 사이다는 무어라 부를까. 정답은 '탄산 단물'이다. 그렇다면 콜라의 북측 이름? 바로 '코코아 탄산 단물'이다.

평양 고려호텔 만찬장의 차림표(메뉴)에는 다음과 같은 음식 이름이 나열돼 있었다.
'방울쉬움떡과 개피떡, 빠다과일단설기, 생선장과, 청포종합랭채, 칠색송어은지구이, 오리찜튀기장즙, 버섯곱돌장, 가두배추말이졸임, 에스키모….'
'칠색송어은지구이'의 '은지(銀紙)'는 '호일', 차림표 마지막의 '에스키모'는 하얀 아이스크림이었다. 북에서 만든 과자의 주원료 표시를 보면 빠다(버터)·사탕가루(설탕)·닭알(달걀)·졸인젖(분유) 등이 눈에 띈다. 북측에서도 '버터'를 대체할 우리말은 고안하지 못한 모양이다. 남측에도 1979년 출시된 '빠다코코낫'이란 과자가 아직도 나오고 있으니, 남북의 접점을 '빠다'에서 찾을 수 있을까. '포장을 뺀 다음 인차(이내, 즉시) 소비해주십시오'란 안내문도 이색적이다.
음식 이야기 하나 더. 이북 대표 음식으로 손꼽히는 '냉면'. 흔히 냉면을 북에서 무어라 부를까를 물어보면 '랭면'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평양랭면의 본고장인 평양에 랭면집은 안 보이고 국수집만 즐비하다. 평양 옥류관에서 접대원이 식사 주문을 받았다.
"물국수로 하시겠습니까, 비빔국수로 하시겠습니까?"
"냉면은 없나요?"
"물국수와 비빔국수가 있습니까. 100그람, 200그람과 300그람짜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국수가 냉면임을 알아차렸다.
기념품 가게로 발길을 돌려보자. 북한 상점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제품이 있었으니, 바로 '항비만제-뽕잎싸락'이었다. 판매원(점원)에게 제품의 효능을 물어봤다.
"살이 많아서 숨쉬기 곤란한 분들 계시잖습니까? 그런 분들 살을 까게 하여준다 말입니다."
'다이어트'의 북측 표현은 '살까기'다. 북도 우리말 표현만 고수하지는 않는다. 지난해 평양의 매대에선 북한이 새로 개발한 노화방지 장수약품 '네오비아그라'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우리로 치면 '누에그라'쯤 될까. 다만 식약청 시험결과 네오비아그라를 비롯한 북한산 건강보조식품에서 중금속이 검출됐기 때문인지, 네오비아그라는 금강산의 매대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조선족도 남한 사회에 적응하려면 한참 동안 말을 배워야 한단다. 하다못해 '계란 프라이'부터 '때 타올'에 '캐시백 포인트'까지, 온갖 한국식 외래어를 소화해야하기 때문이란다. 외래어의 홍수에 젖은 터라 '코코아 탄산 단물'이니 '숨 고르기' 같은 말이 어색하고 촌스럽게 느껴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북에 며칠 머물다보니 북한식 표현이 귀엽고 친근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북한이 우리말을 지키고 가꿔온 노력을 인정하고 상당부분 본받아야 하리라는 생각도 품어본다.
 

겨레말소식
제8차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정기회의 개최
 

· 일시 : 2006년 11월 27일~30일 / 장소 : 중국 북경

 

남과 북의 편찬위원들이 만나 <겨레말큰사전> 편찬을 위한 사항을 논의하는 ‘제8차 남북공동편찬위원회 정기회의’가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3박 4일 동안 중국 북경에서 개최되었다.
지난 제7차 편찬회의에 이어 제8차 회의는 <표준국어대사전>과 <조선말대사전>의  'ㅁ~ㅂ' 부분 올림말 선정,뜻풀이 방식 및 지침과·어문규범(외래어 표기, 형태표기, 문법용어, 두음법칙)에 관한 논의 등이 이루어졌다.

 


겨레말큰사전 편찬을 위한 전주 토론회
 

· 일시: 2006년 11월 3일 / 장소: 최명희 문학관

 

지난 11월 3일 전주 최명희문학관에서는 겨레말큰사전 관계자와 전라북도의 학자와 일반인 1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겨레말큰사전편찬사업회와 최명희문학과, 전주전통문화중심도시추진단이 공동 주최한 ‘<겨레말큰사전> 편찬을 위한 전주 토론회’가 열렸다. ‘전라도의 말, 전라도의 얼’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토론회는 <겨레말큰사전>이 아우르는 겨레말의 다채로움과 전라도 말의 풍요로움을 집중 조명하는 자리였다.

이태영 전북대 교수는 전북이 국어국문학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고장이라고 말했다. <조선말큰사전> 편찬의 주역인 정인승 박사와 대표적인 시조시인 이병기 선생,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가사인 「상춘곡」의 작자인 정극인 또한 백제 유일한 시가인 「정읍사」와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 등에서부터 근래에는 채만식을 비롯하여 신경숙, 신석정, 서정주, 김용택 등까지. 그가 예로 든 한글학자와 문인뿐만 아니라 판소리와 시가, 시조에 있어서도 그 문학적 위상이 남다름을 알 수 있었다.
이태영 교수는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등의 예를 열거하며 전라도 말의 독특한 짜임새가 풍부한 문학적 변용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판소리가 전라도에서 발달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전라도 방언의 특징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전라도 방언은 말씨가 부드럽고 입을 적게 벌리고 발음하는 특징이 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사투리가 특별한 문화를 생성시키는 힘에 대해 역설했다.
이에 대해 토론자로 나선 소강춘 전주대 교수는 판소리와 전라도 사투리의 관계 고찰을 ‘음운현상’과 더불어 ‘원순모음화와 비원순모음화 등의 발생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연구로 확장하는 것을 제안했고, 서정섭 서남대 교수는 <전북 방언사전>이 부재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며 소설과 시, 생활 어휘를 분류하여 소멸되어가는 전북 방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토론회에 앞선 인사말에서 고은 겨레말큰사전 이사장은 ‘겨레말이 겨레의 시작이자 끝’이며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것이 언어이며 따라서 언어는 그 겨레의 영혼’이라고 힘주어 말하며 ‘겨레말의 불씨’인 지역어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를 받아 인사말을 이은 장영달 국회의원은 ‘우리 주변에 열강이 있다면 우리는 말의 강함이 있다’고 말하면서 엄혹한 시기를 헤쳐나가는 희망이 우리 말임을 강조하였다.
홍윤표 겨레말큰사전편찬위원장은 ‘인간은 언어를 통해 협동을 가능하게 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남북 언어의 통합과 지역간 언어의 통합은 겨레의 협동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하며, 겨레말을 되살리는 일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또한 그는 남과북이 문법구조나 음운체계의 차이가 없는 것은 같은 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며 다만 어휘의 차이는 60년 동안 단절된 정치적 이념적 문제로 인한 것일 뿐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소속 30여 명의 직원들은 토론회 이후, 한지공예 체험과 판소리 공연 관람 등 전주전통문화체험을 하였다.


소식지 <겨레말 소식> 창간호 발행

 

지난 10월 9일 한글날, 본 사업회에서는 소식지 <겨레말 소식>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이번 창간호에는 국립국어원 이상규 원장을 모셔 ‘국어정책과 겨레말큰사전’이란 주제로 우리 언어정책의 큰그림을 엿볼 수 있는 대담을 가졌으며, 한성대 이상혁 교수와 국립국어원 전수태 학예연구관이 각각 남측과 북측의 언어 정책에 관해 기술하여 남북 언어정책을 한눈에 비교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겨레말큰사전의 필요성’에 대해 홍윤표 편찬위원장과 김형수 이사가 각각 언어사회학적 측면과 문화적 측면으로 나누어 서술하였으며, ‘겨레말큰사전은 이렇게 만들어 진다’라는 주제로 겨레말큰사전 편찬위원들이 겨레말큰사전 편찬 방법과 진행 과정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이밖에도 남북의 언어를 체험을 통해 쓴 ‘남북의 언어’, ‘문학 작품 속 어휘를 찾아서’, ‘이런말, 저런이야기’ 등 흥미로운 내용들이 실려 있다.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서울시 마포구 공덕2동 253-42 지방재정회관 12층(121-719) 대표전화 02-3275-0815 전송 02-3275-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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