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누리판 2007년 3월
겨레말소식


겨레말과 세계 사전 편찬 경험의 만남

― 겨레말큰사전국제학술회의

지난달 6일(화)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는 서울 명동 전국은행연합회관에서 사전 및 언어학 관련 국내외 전문가를 초청해 ‘세계 사전 편찬 경험과 만나다’라는 주제로 겨레말큰사전국제학술회의를 개최했다. 지난해 국내 학자들을 초청해 개최했던 ‘국내학술회의’에 이어진 이번 학술회의는 세계적인 사전 편찬 경험을 통해 거시적인 관점에서 겨레말큰사전의 편찬 방향과 역사적 과제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기 위해 마련되었다. 특히 이번 대회는 사전학과 언어학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들이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행사 전부터 주목을 받은 세계 사전학의 권위자 라인하트 하트만 버밍엄대학 교수는「메타사전학과 새로운 사전 편찬 작업의 관련성」이라는 주제로 ‘겨레말큰사전’을 비롯한 사전편찬 과정에서 유의해야 할 사항을 10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자세히 소개하였다.

그는 특히 10가지 항목 중에서 다섯 가지 정보 범주(의미, 철자, 발음, 유의어, 어원)에 대한 사전검토와 여섯 가지 사전 정보제시 구조(거대구조, 거시구조, 미시구조, 중개구조, 정보 탐색구조, 정보배치구조)에 대한 합의, 메타사전학의 여섯 가지 측면(사전역사, 사전비평 등) 및 일곱 가지 정보 찾기 활동(활동상의 장애, 외부검색, 내부검색 등)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분단 시기 사전 편찬 경험을 가진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의 클라우스 디터 루드비히 교수는 겨레말큰사전 편찬에 유용한 경험을 일러주었다. 그는 「동서독의 사전어휘 기술」이라는 발제에서 독일어사전의 시대적 변천사와 함께 동독과 서독의 사전 특징, 동서독 통일 후 독일에서 발행된 사전들에 대한 독특한 어휘 표시 등에 대해 다양한 예시를 들어 설명했다. 통일된 이후의 사전에서는 동독에서는 동독의 특유의 실상이나 현상과 관련된 단어의 경우 ‘동독’, ‘구동독’, ‘지역적’, ‘동독일의’ 등으로 표현했으며, 뜻풀이가 잘 밝혀지지 않을 때는 ‘서독’, ‘동독’이라는 국적표시와 함께 두 국가의 어휘 용법을 모두 표기하고 있다.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태평무 교수는「중국동포들의 시각으로 보는 <겨레말큰사전>」이란 발표문에서 “중국에서 조선어교육과 규범화는 혼란상태에 처해있다”며 “대부분의 학교과정이 남의 규범화를 따르고 있지만 몇몇 대학에서는 중국식 규범화를 따르고 있는 곳도 있으며, 학생들은 취업이나 민족적 양심에 따라 남북의 규범과 중국식 규범도 모두 배우고 있는 형편이어서 과외 독서물은 물론 사회출판물, 신문출판물 등이 모두 혼란에 처해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발표는 겨레말큰사전이 동포사회에 가지는 역사적 의의와 중요성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기에 충분하였다.

 
겨레말시선

겨레말과 함께 살려는 강제 징용자들의 노력

―  2차 대전 직후 “사할린” 조선인 학교 교재용 한글문법 『조선문전』 발견

2차 대전 직후 옛 소련 변방의 섬 “사할린”에서 한국인들의 민족어 교육이 조직적으로 실시되었다는 자료가 처음으로 나와 화제가 되고 있다. 이는 근대의 격동 이후 국경의 바깥에 흩어진 겨레가 겨레말의 생명력으로 민족의 존엄을 지키려 했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일본이 1905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넘겨받은 “사할린” 섬 남부는 풍부한 탄전지대로 1940년부터 한국인을 강제 징용해 가서 광부와 벌목공으로 혹사한 곳이었다. 종전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쫓겨 가자 한국인들이 곧바로 일본인 학교를 접수하여 조선인 중학교 과정을 개설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러는 가운데서 저술된 육필 프린트본 『조선문전』이 발견되어 국어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에 도서출판 ‘역락’에서 영인본으로 출판된, 324쪽에 달하는 조선문전(朝鮮文典)

이번에 도서출판 ‘역락’에서 영인본으로 출판된, 324쪽에 달하는 『조선문전(朝鮮文典)』의 저자는 춘계(春溪) 류시욱(柳時郁)이다. 류시욱은 경북 의성 출신으로 1942년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되어 온갖 어려움을 견뎌가며 민족어를 연구하고 이를 사할린 한인 사회에 보급한 그 지역의 대표적인 인텔리였다. 그는 종전 후 개교한 조선인학교에 국어교사로 부임하여 1945년 11월부터 2년에 걸쳐 『조선문전』을 저술하여 사할린의 우리말 교육을 통제하였다. 조선인학교는 소련 당국의 소련 국적 취득 강요와 동화 정책으로 1953년에 결국 폐쇄되었고 이곳에 억류되었던 5만여 교포는 1990년대 러시아의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기까지 모국과 단절된 망향의 섬으로 내버려졌던 것이다.

영인본 해설을 쓴 고영근 서울대 명예교수는 “류시욱의 『조선문전』은 사할린의 우리 민족어 교육의 실상을 엿볼 수 있는 최초의 자료다.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민족어 교육에 대하여는 오창환 계봉우 강채정 김병하 황윤준 등의 저술이 있어 그 실상을 규지할 수 있지만, 사할린의 민족어 교육은, 비록 유인본의 형태이지만, 류시욱의 『조선문전』을 통하여 그 사정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인정된다. 그리고 내용면에서도 이전의 문법서가 미치지 못한 지식 체계가 투영된 점이 없지 않아 이 방면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이 저서는 품사를 ‘기본품사·관능어’ 아래 모두 열 가지로 나눴다. ‘기본품사’로 명사·수사·대명사·동사·형용사·부사를, ‘관능어’로 종지사·접속사·조사·감탄사로 나눴으며, 요즘의 격조사를 격어미로, 어미 중 종결어미를 종지사라고 하였다. 문장을 구어(句語)라고 이름 붙인 것도 재미있다.

총론에서는 ‘문법, 언어와 문자, 조선문자’를 개괄적으로 살피고, ‘성음론’과 ‘형태학’에서는 우리말의 소리와 형태를 한글맞춤법 이상으로 체계를 세워 살피고 있다. 40년대 당시 고립된 사할린에서 국어학 자료가 전무한 현실에서 이만한 체계를 세운 저술을 독자적으로 집필한 것도 놀랍지만, 겨레말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려는 동포사회의 노력이 면면이 배어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남다르다.

 

겨레말나들이

<말에 얽힌 이야기> 거시기

글 : 손홍규(소설가)

 

손홍규(소설가)

 

열여덟에 처음으로 사타구니 습진을 앓은 뒤 해마다 여름이면 나는 이놈의 습진과 싸워야 했다. 습진도 전염이 되는 것인지, 툭하면 내 자취방을 찾아와 내 옷을 자기 옷처럼 입던 한 녀석이 급기야 속옷까지 몰래 입고 가서는 습진에 걸린 적도 있다. (벗어둔 팬티를 세탁한 줄 알고 곱게 개어놓았던 게 원인이었다.) 이때 딱 한번 습진에 감사했을 뿐, 이십 대 내내 나는 습진을 숙적으로 여기고 살았다.

 

◀ 손홍규(소설가)

 

이십대 중반이던 그해 여름에도 어김없이 습진이 방문하셨다. 그때 나는 밀실이라 불러도 족할 약수동의 반 평 남짓한 조붓한 방에서, 부엌이니 화장실이니 하는 부속공간은 전혀 없는 그곳에서, 수배생활의 고달픔을 곱씹으며 더러운 이불을 벗삼아 살았다. 먹을 게 전혀 없는 그 방에서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집단으로 이주하는 벌레들을 지켜보거나, 전혀 방음이 되지 않는 옆방과 앞방 사람들의 생활소음을 영상으로 바꾸는 것뿐이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참말로 거시기했다고나 할까. 그래도 살아야 했고 살려면 먹어야 했고 먹으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학교를 찾아가면 굶지는 않겠지만, 체육복 차림의 전경 수십 명이 학생회관으로 난입해 학생회 간부들을 굴비처럼 엮어 끌고 가는 현장에서 간신히 탈출한 뒤로는 그곳으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생활정보지를 통해 포도시 일자리를 구했으나 오살하게도 주급제였다. 굶어죽기 싫었던 나는 마장동에서 돼지를 후리고 있는 사촌형을 찾아갔다. 사촌형의 옥탑방 문은 잠겨있었으나 열쇠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원시적으로 냉장고와 밥통을 뒤져 허기를 달랜 뒤에는, 문화적으로 온 몸 구석구석 비누칠을 하며 샤워를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방에 들어가 선풍기를 켰다. 두 다리를 크게 벌리고 그 앞에 누운 채, 저 습진이 잦아드는 여름날처럼 가뭇없이 사라져주길 기원했다.

설핏 잠이 들었을까. 요란스레 문이 열리고 우당탕 사람들이 뛰어들고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았다. 나는 입가에 흐른 침을 후루룩 빨아들이고 몽롱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는데, 그들의 눈빛에는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법도 했다. 팬티만 입은 채 선풍기 앞에 두 다리를 쫙 벌리고 누워있는, 사타구니 습진을 앓는 내가 한심하지 않다면 누가 그럴까. 그들은 미란다원칙을 읊는 듯 마는 듯 속사포처럼 내뱉고는 수갑을 채워 어디론가 끌고 갔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내가 끌려간 곳은 장안동 대공분실이었다. 다음 날 정식으로 구속이 되고 여하튼 일사천리로 조서가 꾸며져 검찰로 송치되었다. 거물급 운동권도 아닌 나 같은 피라미 때문에 시간을 허비할 그들이 아니었다. 몇 대 얻어맞긴 했지만 생각처럼 강압적으로, 폭력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밥도 잘 주었고(이건 당시 내게 퍽 중요한 문제였다.) 잠자리도 썩 불편하지는 않았다. 녹록하지 않게 보이려고 밥을 거부할까 하는 생각도 잠깐 떠올렸으나 그런 내 생각과 달리 손은 바쁘게 숟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밥 잘 주는 그들의 신경을 거스르기 싫어 무조건 협조했다. 그때 내가 무심코 언급했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에게 훗날 맞아 죽을 뻔도 했다.(죄송해요 형, 이제 용서해 주세요. 저 프락치 아니거든요.) 그곳에서 며칠 지낸 뒤 동부경찰서 유치장에 수용되었다. 유치장에서는 매끼니 꽁보리밥과 단무지를 줬는데, 이제 고발하지만 그들은 고추장 값을 착복한 게 틀림없다. 이전에 내가 드나든 몇 군데 다른 유치장에서는 분명 고추장도 함께 줬다. 어쨌거나 일주일 뒤 나는 검찰로 송치되어 서울구치소로 이감되었다. 깜깜한 밤이었는데, 여러 개의 보안등이 대낮처럼 환히 비추고 있는 공터는 나처럼 이감되어 온 듯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작은 소란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외국인이 더러 섞여 있었던 모양이다. 교도관들은 만국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있었으나 외국인들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그 꼴이 이 무료하기 짝이 없는 범죄자들에게는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던 셈이다. 머쓱해진 교도관이 손나팔을 만들어 혹시 대학생 없냐고 외쳤다. 그 시절만 해도 대학생을 지성인과 동일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거다. 나는 배가 고팠고, 사타구니가 괴로웠기 때문에 무조건 번쩍 손을 들었다. 교도관은 반색을 하며 내게 다가와 무슨 과냐고 물었다.

“국문관데요.”

“뭐, 국문과? 짜식, 계집애처럼 국문과는. 그나저나 너, 영어 할 줄 알아?”

“글쎄, 거시기……”

“됐다.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녀석이.”

나는 천금같은 기회를 놓친 듯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날부터 매일같이 출정의 연속이었다. 재판이나 공판 혹은 검사심문 때문에 검찰청, 법원으로 불려다니는 걸 출정이라고 했다. 담당검사는 젊은 사내였는데, 그는 나 같은 피라미를 맡은 게 무척 속상했는지 내내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물론 검사는 나와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심문하고 공소장을 작성하는 일은 대개 계장이라는 사람이 했다. 으레 공안검사들은 피의자구속기간을 한차례 연장해 스무날 동안 피의자들을 검찰청으로 불러들인다. 검찰청 내의 구치감에 하루 종일 처박아놓고 돌려보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옥에도 비교적 견딜만한 등활지옥부터 그악스럽기 짝이 없는 무간지옥까지 여러 등급이 있듯이 구치소와 구치감은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었다. 구치소에서는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있고 신문도 볼 수 있지만, 구치감에서는 하루 종일 벽만 보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건 하루 종일 수갑을 차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습진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내게는 참기 힘든 고역이었다. 사타구니 습진을 앓으신 분들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가려움을 이겨내는 처방은 퍽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무작정 득득 긁어대면 환부가 넓어질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손가락에 습진균이 옮을 수도 있다. 웬만한 가려움은 견디다가 도저히 참기 힘들 만큼 가렵다 싶을 때 그 부위를 가볍게 툭툭 쳐야 한다. 그러면 얼마 동안은 가려움증도 사라지고 외려 시원함마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수갑을 찬 상태에서는 이 세심한 처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정말 사타구니에 수의근이 있어 내 맘대로 쥐락펴락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쨌거나 출정은 일종의 피의자 길들이기인 셈이다. 한번 출정을 나갔다 하면 사람들은 예외 없이 기진맥진한 상태로 돌아왔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검사한테 굴복하고 싶어지고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싶어지게 마련이었다.

또 한가지 내가 애석했던 점은 유치장에 있을 때는 물론이요 구치소로 이감된 뒤로도 그 누구도 면회를 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아무도 몰랐던 거다. 내가 구속되어 있는 걸. 출정을 나가 검사실에 들어서면 나는 계장에게 전화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계장은 고개를 저으며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계장은 사십대 후반의 사내였는데, 공무원 특유의 냉소적이며 습관적인 무뚝뚝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딱히 번문욕례에 집착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 만큼의 부드러움도 지니고 있었다. 검사실에서 검사와 계장의 관계는 군대와 비교하자면 중대장과 행정관, 대대장과 주임원사의 관계와 비슷했다. 그들은 서로 존댓말을 썼는데 때때로 검사가 자신의 방문을 벌컥 열고 나와 계장에게 이건 공소시효가 몇 년이죠? 물으면 계장은 십오 년이죠, 라고 답하는 식이었다. 계장은 검사보다 법에 밝았고 실무에 능했으며 피의자를 상대하는 고달픈 일을 도맡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계장은 피의자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계장은 내 앞에서 사적인 통화를 하다가 본색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방심했던 그는 통화 도중에 ‘거시기’라는 낱말을 쓰고야 말았다.

“아니, 아저씨도 전라도면서 지금까지 내내 모른 척 했던 거대요? 어디셔요?”

근엄했던 그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자포자기한 듯 대답했다.

“전주다.”

“이럴 수가. 제가 전주 해성고 나온 거 아시잖아요. 그러면서 모른 척 하셨어요? 전주 어디요?”

“팔복동.”

“팔복동! 대로변 은혜 미용실 아시죠? 거기 아들네미가 제 동창이어요.”

이렇게 동향을 내세워 나는 기어이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딱 한 통화라는 조건이었기에 고향집 번호를 눌렀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다.

“어머니, 저여요.”

“아니, 홍기야. 너 어디냐?”

“어머니 죄송해요. 저 구속되어서 서울구치소에 있어요.”

어머니는 한 달 전부터 형사라는 사람들이 와서 나를 찾았다며 자수만 하면 선처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자수하라는 말만 되풀이하셨다.

“자수고 말고가 없어요. 이미 구속되었어요.”

“그러니까 이놈아 자수를 허라고!”

“그게 아니라요 어머니, 이미 구속이 되었다고요.”

“호랭이 물어갈 놈! 에미 속 터져 죽는 꼴 보고잡냐? 얼렁 자수를 허란 말여!”

“그게 안 된다니까요!”

“그리도 이놈이! 얼렁 자수혀!”

이렇게 되고야 말았다. 어미는 말 안 듣는 자식에게 분통이 터졌고 자식은 말귀 못 알아듣는 어미에게 분통이 터졌다. 안중근 의사처럼 통화하고 싶었으나 현실은 참담했다. 내가 전화를 끊고 한동안 소침해 있자 계장이 물었다.

“왜 그러냐? 속이 안 좋냐?”

아, 이 야속한 계장 아저씨. 다 듣고 있었으면서 눙치기는.

“속이 안 좋은 게 아니라 습진 때문예요. 아저씨, 거시기 앓아보신 적 있으세요?”

폼나는 기억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때 ‘거시기’라는 낱말에서 틈을 엿보았다. 그게 고향의 낱말이어서가 아니었다. 법과 제도라는 그물망에 완고하게 포획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이 방심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보여준 그 틈. 올가미처럼 목을 조여오는 이 각다분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작지만 커다란 틈 말이다. 완고한 검찰공무원마저 순식간에 무장해제 시켜버린, 매끈하고 단조로운 도자기에 진정한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균열 같은 그것 말이다. 추신. 습진은 몇 해 전 완전히 치료되셨다.

 

* 글 : 손홍규 - 1975년 전북 정읍 출생. 소설집 『사람의 신화』,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

 


<남북의 언어> 온기 어린 말의 소통을 꿈꾸며

글 : 함보현 기자 (연합뉴스 민족뉴스부)

 

함보현(연합뉴스 기자)

 

'아니, 이렇게 살벌한 말을?'

처음 북한 관련 기사를 쓸 때 제일 먼저 든 인상이었다. 주로 조선중앙통신이나 중앙방송, 노동신문 등 북한의 공식적인 언론매체는 남한에서 보면 당연히 부적합 판정을 받을 말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북한 언론의 '막말 행진'은 미국과 대립이 첨예하게 계속된 최근 몇 년 사이 흔히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2005년 4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향해 "부시는 한 나라의 대통령은 고사하고 정상적인 인간의 체모도 갖추지 못한 불망나니이며 애당초 우리가 상대할 대상이 못되는 도덕적 미숙아, 인간추물"이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 함보현(연합뉴스 기자)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폭군', '위험한 사람' 등으로 지칭한 직후 일종의 반격이었지만 대외적으로 북한의 공식 입장을 밝히는 창구인 외무성에서 "텍사스 목장의 말몰이꾼에 불과한 부시"라는 표현까지 거침없이 쓰다니 이건 좀 아니라는 거부감도 들었다. 때로 이보다 더한 표현도 나와 이를 여과 없이 전달해야 하느냐, 순화해서 표현해야 하느냐를 두고 가끔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물론 이렇게 언론의 표현이 거친, 혹은 거칠다고 느끼는 데는 남북한 체제와 언론의 역할이 다르다는 점이 작용한다. 최고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북한 사회에서 언론은 밖으로 '저격수'가 되기도 하고 안으로 당의 정책이나 지침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현실이 이러하니 '주체의 언론'을 표방한 북녘의 언론 보도가 남녘 사람들의 눈에 괴이하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문제는 이런 인상이 저도 모르게 선입견을 남긴다는 점이었다. 부시 대통령이 '불망나니'라는 별명을 받은 그 즈음 평양으로 처음 취재를 갔던 때의 일이다. 북한 현지에서 취재는 엄격히 안내원의 통제에 따라 이뤄지기 때문에 일반 주민들과 말을 섞을 기회가 없다. 그래도 호시탐탐 그어놓은 선을 넘고 싶은 것이 기자의 만성적인 직업병이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안내원 동무의 눈을 피해 주민들과 '접촉'을 시도하면서 평양 시민들은 평소에 어떤 말을 쓸까 하는 단순한 호기심에 귀를 쫑긋 세웠다. 최대한 남녘에서 온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어정쩡하게 서 있기를 여러 차례.

“야, 오랜만이구만. 이 다이야(타이어) 어디서 했니?”..“장마당 남새(채소) 값이 좀 눅었다고…”

실망스럽게도(?) 그야말로 아침에 만나면 안녕하냐는 식의 일상적인 말이었다. 역시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북한 동포들이 일상생활에서 삭막한 표현이나 찬양 일색의 말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자명한데도 '혹시나'하는 마음이 몰래 자리 잡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이 고집도 센 법이다.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에서 북녘 소년소녀들의 공연을 관람하고 나오는 길에 또 고질병이 도졌다. 마침 계단 아래서 '붉은색 머플러'를 한 소녀가 뛰어오기에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학생소년궁전에서 뭘 배워요?”.. “화술소조 배웁니다.”

“화술은 재미있어요?”.. “재미있으니 하지요. 후에 방송원(아나운서)이 되고 싶습니다.”

“언제 서울에 오면 꼭 봐요.”.. “네! 다음에 꼭 만납시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대강 이런 대화였다. 이렇게 소박한 대화를 나누고서야 스스로 불필요한 편견을 갖고 북녘 동포를 대하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당국의 냉랭하고 공식적인 말과 사람이 입김이 담긴 말은 얼마나 다른가. 그런데 한 꺼풀 포장된 북한말이 아니라 북녘 동포의 진짜 말을 직접 듣고 대화를 나눌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지금은 삼척동자라도 북녘 사람들이 붉은 얼굴에 꼬리를 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르긴 해도 북녘에서도 더 이상 남녘 동포들이 '미제'의 억압 속에 깡통을 차고 다닌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예전보다 직접 남과 북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 마음의 눈이 좀더 선명하게 떠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말의 소통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왠지 진심이 아닌 말을 할 것 같다는 '의심'이 남아 있는 것도 문제지만 실제 얼굴을 마주하고 앉을 자리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다. 서로 입 냄새를 맡아가며 아침에는 뭘 먹었는지, 자녀교육에 어려움은 없는지, 요즘은 어떤 영화가 인기인지…. 이런 따뜻한 말이 자연스레 오갈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

1989년부터 올해 1월까지 금강산 관광객을 제외하고 28만이 넘는 사람들이 남북을 오갔다고 한다. 통계에는 잡히지 않겠지만 이렇게 오가는 사이 온기 어린 말도 좀더 많이 오가기를 기대해본다.

 

겨레말이모저모

제5차 이사회 개최(예정)

 

 

 

·  일시 : 2007년 3월 14일(수) 오후 6시

·  장소 : 겨레말큰사전사업회 회의실

 

겨레말큰사전사업회에서는 제5차 이사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이번 이사회 안건으로는 2006년 사업 평가와 2007년 사업 계획을 시작으로 2006년 결산 보고 및 예산의결, 정관 개정안 검토 등이다.

또한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법 입법대책도 함께 논의할 예정이다.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제2기 임원 취임 및 결성 2주년 기념식” 개최

 

 

 

·  일시 : 2007년 3월 5일(월) 오후 5시

·  장소: 백범기념관 대회의실

 

6.15 남측위는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제2기 임원 취임 및 결성 2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이 기념식에 앞서 정기 공동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고 백낙청 상임대표의 연임을 결정, 박순성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소장을 정책위원장으로 내정했다. 2기 상임대표로 연임된 백낙청 상임대표는 “2007년의 새봄은 새로운 희망으로 시작되고 있다”며 지난날의 성과에 만족하거나 호전된 정세에 안주하지 말자고 말했다.

 

겨레하나합창단의 공연으로 시작한 이날 기념식은 지난해 광주지역에서 진행된 6.15민족통일대축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데 기여한 6.15남측위 광주전남본부 이명한 전 상임대표가 공로패를 받았으며, 민족춤패 ‘출’이 축하공연을 선보였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는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 공동선언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로 자주적 통일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모아서 만들어졌으며, 2005년부터 자주적 통일을 위하여 매년 남과 북을 오가며 “민족대축전”을 개최하고 있다.

2007 한글학회 전국 국어학 학술대회 개최

 

지난 2월 24일, 전남대학교 언어교육원 강당에서 "2007년 전국 국어학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번 학술대회에는 한글학회 전남지회와 대구지회가 공동으로 열어 영호남 지역의 실력 있는 국어학자분들이 대거 참가하였다.이날 발표자로는 “청취 등급에 따른 높낮이 기술” 에 김차균(충남대 명예 교수), “아래아(‘ㆍ’) 문제를 다시 생각함”에 김동소(대구가톨릭대)1.1.  아래아(‘ㆍ’) 문제를 다시 생각함_ 김동소, “아래아(‘ㆍ’) 문제를 다시 생각함(김동소)에 대한 토론”에 배주채(가톨릭대) 등의 발표로 시종일관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발표 자료집은 한글학회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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