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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손홍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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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에
처음으로 사타구니 습진을 앓은 뒤 해마다
여름이면 나는 이놈의 습진과 싸워야 했다.
습진도 전염이 되는 것인지, 툭하면 내 자취방을
찾아와 내 옷을 자기 옷처럼 입던 한 녀석이
급기야 속옷까지 몰래 입고 가서는 습진에
걸린 적도 있다. (벗어둔 팬티를 세탁한 줄
알고 곱게 개어놓았던 게 원인이었다.) 이때
딱 한번 습진에 감사했을 뿐, 이십 대 내내
나는 습진을 숙적으로 여기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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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홍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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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중반이던 그해 여름에도 어김없이 습진이 방문하셨다.
그때 나는 밀실이라 불러도 족할 약수동의
반 평 남짓한 조붓한 방에서, 부엌이니 화장실이니
하는 부속공간은 전혀 없는 그곳에서, 수배생활의
고달픔을 곱씹으며 더러운 이불을 벗삼아 살았다.
먹을 게 전혀 없는 그 방에서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집단으로 이주하는 벌레들을 지켜보거나, 전혀
방음이 되지 않는 옆방과 앞방 사람들의 생활소음을
영상으로 바꾸는 것뿐이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참말로 거시기했다고나
할까. 그래도 살아야 했고 살려면 먹어야 했고
먹으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학교를 찾아가면
굶지는 않겠지만, 체육복 차림의 전경 수십
명이 학생회관으로 난입해 학생회 간부들을
굴비처럼 엮어 끌고 가는 현장에서 간신히
탈출한 뒤로는 그곳으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생활정보지를 통해 포도시
일자리를 구했으나 오살하게도 주급제였다.
굶어죽기 싫었던 나는 마장동에서 돼지를 후리고
있는 사촌형을 찾아갔다. 사촌형의 옥탑방
문은 잠겨있었으나 열쇠 있는 곳을 알고 있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원시적으로 냉장고와
밥통을 뒤져 허기를 달랜 뒤에는, 문화적으로
온 몸 구석구석 비누칠을 하며 샤워를 하고
상쾌한 기분으로 방에 들어가 선풍기를 켰다.
두 다리를 크게 벌리고 그 앞에 누운 채, 저
습진이 잦아드는 여름날처럼 가뭇없이 사라져주길
기원했다.
설핏
잠이 들었을까. 요란스레 문이 열리고 우당탕
사람들이 뛰어들고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았다.
나는 입가에 흐른 침을 후루룩 빨아들이고
몽롱한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는데, 그들의
눈빛에는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법도 했다. 팬티만 입은 채 선풍기 앞에 두
다리를 쫙 벌리고 누워있는, 사타구니 습진을
앓는 내가 한심하지 않다면 누가 그럴까. 그들은
미란다원칙을 읊는 듯 마는 듯 속사포처럼
내뱉고는 수갑을 채워 어디론가 끌고 갔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내가 끌려간 곳은 장안동
대공분실이었다. 다음 날 정식으로 구속이
되고 여하튼 일사천리로 조서가 꾸며져 검찰로
송치되었다. 거물급 운동권도 아닌 나 같은
피라미 때문에 시간을 허비할 그들이 아니었다.
몇 대 얻어맞긴 했지만 생각처럼 강압적으로,
폭력적으로 대하지는 않았다. 밥도 잘 주었고(이건
당시 내게 퍽 중요한 문제였다.) 잠자리도
썩 불편하지는 않았다. 녹록하지 않게 보이려고
밥을 거부할까 하는 생각도 잠깐 떠올렸으나
그런 내 생각과 달리 손은 바쁘게 숟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밥 잘 주는 그들의 신경을
거스르기 싫어 무조건 협조했다. 그때 내가
무심코 언급했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에게
훗날 맞아 죽을 뻔도 했다.(죄송해요 형, 이제
용서해 주세요. 저 프락치 아니거든요.) 그곳에서
며칠 지낸 뒤 동부경찰서 유치장에 수용되었다.
유치장에서는 매끼니 꽁보리밥과 단무지를
줬는데, 이제 고발하지만 그들은 고추장 값을
착복한 게 틀림없다. 이전에 내가 드나든 몇
군데 다른 유치장에서는 분명 고추장도 함께
줬다. 어쨌거나 일주일 뒤 나는 검찰로 송치되어
서울구치소로 이감되었다. 깜깜한 밤이었는데,
여러 개의 보안등이 대낮처럼 환히 비추고
있는 공터는 나처럼 이감되어 온 듯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작은 소란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외국인이 더러 섞여 있었던 모양이다. 교도관들은
만국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하고 있었으나 외국인들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그 꼴이 이 무료하기
짝이 없는 범죄자들에게는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던
셈이다. 머쓱해진 교도관이 손나팔을 만들어
혹시 대학생 없냐고 외쳤다. 그 시절만 해도
대학생을 지성인과 동일시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거다. 나는 배가 고팠고, 사타구니가 괴로웠기
때문에 무조건 번쩍 손을 들었다. 교도관은
반색을 하며 내게 다가와 무슨 과냐고 물었다.
“국문관데요.”
“뭐,
국문과? 짜식, 계집애처럼 국문과는. 그나저나
너, 영어 할 줄 알아?”
“글쎄,
거시기……”
“됐다.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녀석이.”
나는
천금같은 기회를 놓친 듯 서운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날부터
매일같이 출정의 연속이었다. 재판이나 공판
혹은 검사심문 때문에 검찰청, 법원으로 불려다니는
걸 출정이라고 했다. 담당검사는 젊은 사내였는데,
그는 나 같은 피라미를 맡은 게 무척 속상했는지
내내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물론 검사는 나와
거의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심문하고 공소장을
작성하는 일은 대개 계장이라는 사람이 했다.
으레 공안검사들은 피의자구속기간을 한차례
연장해 스무날 동안 피의자들을 검찰청으로
불러들인다. 검찰청 내의 구치감에 하루 종일
처박아놓고 돌려보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옥에도
비교적 견딜만한 등활지옥부터 그악스럽기
짝이 없는 무간지옥까지 여러 등급이 있듯이
구치소와 구치감은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었다. 구치소에서는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있고 신문도 볼 수 있지만, 구치감에서는 하루
종일 벽만 보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건 하루 종일 수갑을 차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습진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내게는 참기
힘든 고역이었다. 사타구니 습진을 앓으신
분들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가려움을 이겨내는
처방은 퍽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무작정 득득 긁어대면 환부가 넓어질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손가락에 습진균이 옮을 수도
있다. 웬만한 가려움은 견디다가 도저히 참기
힘들 만큼 가렵다 싶을 때 그 부위를 가볍게
툭툭 쳐야 한다. 그러면 얼마 동안은 가려움증도
사라지고 외려 시원함마저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수갑을 찬 상태에서는 이 세심한 처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정말 사타구니에 수의근이
있어 내 맘대로 쥐락펴락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쨌거나
출정은 일종의 피의자 길들이기인 셈이다.
한번 출정을 나갔다 하면 사람들은 예외 없이
기진맥진한 상태로 돌아왔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검사한테 굴복하고 싶어지고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싶어지게 마련이었다.
또
한가지 내가 애석했던 점은 유치장에 있을
때는 물론이요 구치소로 이감된 뒤로도 그
누구도 면회를 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아무도
몰랐던 거다. 내가 구속되어 있는 걸. 출정을
나가 검사실에 들어서면 나는 계장에게 전화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계장은
고개를 저으며 규정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계장은 사십대 후반의 사내였는데, 공무원
특유의 냉소적이며 습관적인 무뚝뚝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딱히 번문욕례에 집착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을 만큼의 부드러움도 지니고 있었다.
검사실에서 검사와 계장의 관계는 군대와 비교하자면
중대장과 행정관, 대대장과 주임원사의 관계와
비슷했다. 그들은 서로 존댓말을 썼는데 때때로
검사가 자신의 방문을 벌컥 열고 나와 계장에게
이건 공소시효가 몇 년이죠? 물으면 계장은
십오 년이죠, 라고 답하는 식이었다. 계장은
검사보다 법에 밝았고 실무에 능했으며 피의자를
상대하는 고달픈 일을 도맡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계장은 피의자와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계장은 내 앞에서 사적인
통화를 하다가 본색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방심했던 그는 통화 도중에 ‘거시기’라는
낱말을 쓰고야 말았다.
“아니,
아저씨도 전라도면서 지금까지 내내 모른 척
했던 거대요? 어디셔요?”
근엄했던
그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자포자기한
듯 대답했다.
“전주다.”
“이럴
수가. 제가 전주 해성고 나온 거 아시잖아요.
그러면서 모른 척 하셨어요? 전주 어디요?”
“팔복동.”
“팔복동!
대로변 은혜 미용실 아시죠? 거기 아들네미가
제 동창이어요.”
이렇게
동향을 내세워 나는 기어이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다. 딱 한 통화라는 조건이었기에 고향집
번호를 눌렀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울컥 눈물이 나올 뻔했다.
“어머니,
저여요.”
“아니,
홍기야. 너 어디냐?”
“어머니
죄송해요. 저 구속되어서 서울구치소에 있어요.”
어머니는
한 달 전부터 형사라는 사람들이 와서 나를
찾았다며 자수만 하면 선처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자수하라는 말만 되풀이하셨다.
“자수고
말고가 없어요. 이미 구속되었어요.”
“그러니까
이놈아 자수를 허라고!”
“그게
아니라요 어머니, 이미 구속이 되었다고요.”
“호랭이
물어갈 놈! 에미 속 터져 죽는 꼴 보고잡냐?
얼렁 자수를 허란 말여!”
“그게
안 된다니까요!”
“그리도
이놈이! 얼렁 자수혀!”
이렇게
되고야 말았다. 어미는 말 안 듣는 자식에게
분통이 터졌고 자식은 말귀 못 알아듣는 어미에게
분통이 터졌다. 안중근 의사처럼 통화하고
싶었으나 현실은 참담했다. 내가 전화를 끊고
한동안 소침해 있자 계장이 물었다.
“왜
그러냐? 속이 안 좋냐?”
아,
이 야속한 계장 아저씨. 다 듣고 있었으면서
눙치기는.
“속이
안 좋은 게 아니라 습진 때문예요. 아저씨,
거시기 앓아보신 적 있으세요?”
폼나는
기억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나는 그때 ‘거시기’라는
낱말에서 틈을 엿보았다. 그게 고향의 낱말이어서가
아니었다. 법과 제도라는 그물망에 완고하게
포획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이 방심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보여준 그 틈. 올가미처럼 목을 조여오는
이 각다분한 삶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작지만 커다란 틈 말이다. 완고한 검찰공무원마저
순식간에 무장해제 시켜버린, 매끈하고 단조로운
도자기에 진정한 아름다움을 부여하는 균열
같은 그것 말이다. 추신. 습진은 몇 해 전
완전히 치료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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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손홍규 - 1975년
전북 정읍 출생. 소설집 『사람의 신화』,
장편소설 『귀신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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