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탐구

유유, 사전을 말하다

조성웅 유유 대표

출판사에서는 책을 만든다. 당연하다. 책을 만들 때는 사전이 필요하다. 이 또한 당연하다. 한데 시나브로 종이사전이 사라지고, 그나마 몇 안 남은 종이사전도 온라인 포털 사이트로 옮겨갔다. 해서 단행본을 만드는 한국의 출판사 편집자들은 포털 사이트의 사전과 국립국어원에서 제공하는 《표준국어대사전(웹)》을 참고하며 책을 만들게 됐다. 그 상황은 내가 일하는 유유 출판사도 예외가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우리가 쓰는 말과 글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렇다면 이 말과 글을 갈무리하여 모은 사전도 언중의 쓰임에 따라 끊임없이 갱신됨이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포털에서는 기존의 종이사전을 디지털화하여 서비스하는 데만 급급하고, 정부 산하기관인 국립국어원에서는 더러 업데이트를 하긴 하나 큰 문제점은 바로잡지 못하고 작고 부분적인 것만 다듬는 형편이다. 예전에는 집마다 국어사전 한 권은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통념이 있었다. 종이사전을 돈 내고 구입하는 이들이 꽤 있었고, 이 수요에 부응하여 민간의 출판사들이 사전 팀을 꾸리고 사전을 새롭게 편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지금에 와서 제대로 된 사전 편찬 작업이란 게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그러나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제대로 된 정규전(正規戰) 같은 사전을 만들기가 어렵다면 게릴라식의 사전 만들기는 어떨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차에 사계절 출판사에서 나온 『검색, 사전을 삼키다』,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을 읽었고 저자인 정철 선생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1일차

*출처: 유유

네이버, 다음, 카카오를 거치며 한국 웹사전의 기본 틀을 디자인한 웹사전 기획자 정철 선생은 한국 사전의 현 상황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는 ‘사전 덕후’이자 ‘음악 덕후’이며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재밌는 분이었다. 선생과 만나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나서 집필을 의뢰한 책이 사전 보는 법이다. 갈수록 보는 사람이 줄어들어 사실상 개정과 편찬 작업을 멈춘 우리 사전의 현 상황을 돌아보고, 사전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열악한 상황을 개선할 방법이 있는지, 정제되지 않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좋은 사전이 얼마나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 등을 고민하고 어떻게든 개선해 보려고 애쓴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우리가 현재 철석같이 믿고 쓰는 사전들이 적어도 이삼십 년간 한 번도 업데이트되지 않았다는 정철 선생의 말에 놀라고 실망했다가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난다. 『사전 보는 법』이 꼭 필요한 책이라 생각했고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두루 관심 가질 만한 내용이 담겼으니 판매도 좋으리라 낙관했는데, 뚜껑을 열고 보니 착각이었다. 생각보다 책을 보는 사람들도 사전이라는 주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했다. 초판 이천 부를 찍었는데, 아직도 창고 한구석에 먼지가 소복이 덮인 채 쌓여 있으니.

정철 선생과 맺은 인연으로 ‘읽는 사전’의 필요를 절감하고 나서 다른 저자와 다시 사전 콘셉트의 책을 계약하게 됐는데 그것이 우리말 어감사전이다. 이 책의 저자인 안상순 선생은 삼십 년 넘게 전통 사전을 편찬하는 작업을 해 오신, ‘사전 편찬의 1세대 장인’으로 평가받는 분이다. 어떻게 하면 일반 독자들에게 사전을 읽힐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차에, 비슷해 보이지만 미묘하게 다른 속뜻을 가지는 단어들을 모아 이 단어들의 의미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손에 잡힐 듯이 쓴 원고를 작업하고 계셨다. 처음 출판사에 보내신 원고는 이삼십 꼭지 정도였다. 담당 편집자가 이를 단행본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을 궁리한 끝에 독자들이 끝까지 읽어 낼 수 있도록 원고량을 조절하고 꼭지 수를 늘린 다음 이를 사전 꼴로 편집해 보기로 했다. 선생이 다시 집필할 단어를 뽑고 그간의 연구를 정리하여 원고로 집필한 후 편집부에 보내셨는데, 그게 백 꼭지에 가까운 분량이었다. 편집부에서 단어들을 가나다순으로 정리하고 독자가 궁금한 단어를 바로 찾아 읽을 수 있도록 편집했다.

2일차

*출처: 유유

교정 교열 작업을 하면서 책 제목을 궁리하다가 ‘어감’이라는 단어를 쓰기로 했다. 정직하게 표현하면 유의어 사전이라고 해야겠지만 이 사전을 사용할 독자 입장에서는 ‘유의어’라는 딱딱한 문법 용어보다 이 책을 읽으면 미묘하게 다른 단어의 느낌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겠다는 믿음을 줄 만한 단어로, ‘어감’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표지 디자인도 독자들의 좋은 반응을 얻는 데 일조했는데, 디자이너가 ‘어감’을 표지에 구현하려고 그야말로 칠전팔기의 노고를 들였다.

포스터

*출처: 유유

결과적으로 이 책은 두어 달 만에 만 부를 훌쩍 넘는 판매 성적을 거두었다. 삼십여 년간의 사전 편찬으로 쌓인 내공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읽히는 사전을 쓰겠다는 열의를 담은 원고와 이를 독자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 고민한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노고가 잘 버무려져 얻은 열매가 아닌가 한다. 다만 한스러운 일은 저자 안상순 선생께서 원고를 집필하신 후 완성된 책을 보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세상을 뜨셨다는 것이다. 책이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는 모습을 보셨으면 무척 좋아하셨을 텐데….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 번 사전 편찬에 평생을 바친 고인의 명복을 빌고 그를 기억하고자 한다.

포스터

*출처: 유유

유유에서 출간한 책 중에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호되게 꼬집은 책도 있다. 시인 겸 소설가로 전직 국어교사를 역임하기도 한 박일환 선생이 쓰신 국어사전 혼내는 책이다. 이 책의 기획은 당초 선생이 페이스북에 생각 날 때마다 현 국어사전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 글에서 시작됐다. 그 글을 보고 선생께 연락해서 책으로 묶어 보자고 제안을 드렸고, 선생이 페이스북에 쓴 원고를 원재료로 삼아 다듬어 편집부에 건네주셨다. 처음에는 단행본 편집자들이 신줏단지처럼 떠받들면서 믿고 이용하는 국어사전이 온전하지 않으며 숱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선생이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바로잡을 대안과 방법을 궁리하여 내놓은 기개와 실천에 감탄했다. 국립국어원의 관계자가 이 문제들을 알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바로잡을 의지가 있는지 궁금하다. 표준국어대사전이 가진 여러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 이들이 한둘이 아닌 것으로 안다. 문제를 알기만 하여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고, 국가 차원에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야 할 수 있는 일일 테니 당장이 아니라도 한국인이 믿고 쓸 수 있는 국어사전을 위한 장기적인 계획과 집행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곧 출간될 책을 소개해 볼까 한다. 이 책도 ‘사전’인데 제목이 책의 사전이다. 저자는 서평가이자 출판평론가, 번역가, 작가로 활약하는 표정훈 선생이다. 늘 책과 함께하는 인생을 살아온 선생은 동서양의 문학, 역사, 철학을 가로지르며 지식을 그러모아 정리하기를 즐기는데, 이번 책은 ‘책’과 관련하여 우리가 떠올릴 만한 키워드를 백여 개 골라 뽑은 후 해당 키워드와 연관한 책 이야기를 동서고금을 횡단하며 풀어 놓은 기대작이다. 예컨대 ‘서재’라는 키워드를 뽑은 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개인 서재를 둘러보다 중국 루쉰의 집으로 넘어가 루쉰이 서재에 앉아 황혼 무렵 글 쓰는 풍경을 그려 보고는 이탈리아로 날아가 마키아벨리가 했다던 다음과 같은 서재 예찬을 소개하는 식이다.

“저녁이 오면 난 집에 돌아와 서재로 들어가네. 문 앞에서 온통 흙먼지로 뒤덮인 일상의 옷을 벗고 왕궁과 궁중의 의상으로 갈아입지. (중략) 이 시간 동안만은 나에게 아무런 고민도 없다네.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린다는 말일세. 쪼들리는 생활도 나아가 죽음까지도 나를 두렵게 하지는 못하네.”

그야말로 책에 관한 흥미로운 잡학이 선물처럼 한가득 담긴 책이라고나 할까. 이 책은 체계를 쫀쫀하게 갖춘 것은 아니나 일종의 백과사전적 지식을 사전이라는 틀에 담아낸 교양서이다. 유유는 이런 ‘잡학 사전’도 만든다.

유유에서 ‘사전’을 주제어로 만든 책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이것저것 주워섬겨 보았다. 정석으로 사전을 만들 수 없는 시대가 된 지금 출판인으로서 나는 앞으로의 사전은 ‘찾아보는’ 사전이 아닌 ‘읽는’ 사전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우리의 삶을 형용하는 말과 글을 오롯이 담는 도구가 사전이라면 이 도구는 꾸준히 갱신되어 쓰여야 하는데, 어쩌면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사전을 업데이트하는 현실적인 방법은 독자들이 궁금해 하고 실생활에서 읽고 싶어 할 만한 지식을 알뜰하게 갈무리한 ‘읽는’ 사전들이 다종다양하게 나오는 것이 아닐까. 겨레말

장지원
조성웅
도서출판 유유 대표. 대학에서 중국어를 공부했다. 생각의나무, 김영사, 돌베개에서 편집자로 일하다가 출판사를 차려 독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