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창

코리아학과 국제고려학회

이상혁 한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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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과 조선학, 그리고 코리아학

한류 열풍은 부인하기 어려운 국제적 유행이 되었다.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 국격의 상승과 함께 한국 문화,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한류에 바탕을 둔 대중문화의 국제적 확산은 우리 학술계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한국학(Korean Studies)이 다른 나라의 대학과 연구 기관에서 의미 있는 지역학 연구의 한 분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한국학에 대한 관심은 북측은 물론이려니와 우리 근현대사에서 파생한 해외의 ‘코리언 디아스포라’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이는 한국학 연구를 한반도(조선반도)의 한쪽에만 한정하지 않으려는 자연스러운 학술적 욕구와 맞물려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 ‘Korean Studies’를 ‘한국학’으로 번역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우리의 시각에서는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만족스럽지도 않다. 남측의 학문적 판도 안에서는 자연스러운 용어이겠지만, ‘코리아’의 반쪽, 북에서는 그 용어를 달갑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측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조선학(朝鮮學)’은 만족스러운 용어일까? 이 ‘조선학’ 역시 ‘Korean Studies’의 번역어로 북측과 중국 연변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심지어 일본 학계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예컨대, 조선학을 연구한다고 하는 일본의 보수적인 학회 이름은 글자 그대로 ‘조선학회’이다. 물론 그 맥락과 의미는 북측이나 연변 등에서 사용하는 그것과 다를 것으로 추정된다.

언뜻 보기에 사소해 보이는 이 용어 차이는 불필요하게 남북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한국학’이 옳으니, ‘조선학’이 더 타당하니 하면서 학술적으로 용어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일찍이 남북 통합에 관심을 둔 많은 연구자들은 이러한 갈등에 대한 고민 끝에 새로운 용어를 제안했다. 1990년대, ‘한국학’도 ‘조선학’도 아닌 ‘코리아학’이라는 중립적 용어가 탄생했다. 완전히 만족스러운 용어는 아니나, 국제고려학회의 창립과 함께 남북 연구자들이 모두 동의한 용어라는 데 의의가 있었다. ‘Korean Studies’의 발전과 남북 학술 교류의 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코리아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온 국제고려학회는 이제 햇수로 20년이 지난 ‘청년 학회’가 되었다. 이 학회는 동서양의 여러 해외 대학에서 뜻깊은 학술대회를 개최하면서 거의 유일하게 통합적 남북 학술 연구의 중추적인 단체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남북 통합 국어학사 연구

이 학회의 회원인 필자 역시 자연스럽게 코리아학의 취지에 공감하며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어학(북측 시선에서는 조선어학)을 전공하고 있는 필자가 특히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어학사도 코리아학의 일부이다.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이 이 국어학사 분야도 역사적 시대 구분이 가능하다. 그 중에서 근현대 역사를 간단히 회고해 보면 여느 학문 분야와 마찬가지로 어학 분야도 학술적인 분단과 균열의 아픔을 겪었다. 해방 후 국어학 연구자들은 정치적 신념을 바탕으로 남북으로 갈라져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학술 연구의 균열이 시작된 지점이다. 결국 1950년 이후부터 언어에 대한 연구 역사도 한국어학사와 조선어학사로 분단되었다. 같은 언어 자료를 다루면서도 각자의 진영에서 언어 연구의 방법론과 관점이 달랐다. 다르기도 했지만, 그것을 핑계로 남북은 서로 상대의 연구 성과를 애써 무시해왔고, 불행하게도 정치적 분단은 학술 연구의 분단을 견인했다.

코리아학의 관점에서 필자는 1945년 이후 ‘남북 통합 국어학사’의 문제를 꾸준히 거론해 왔다. 국어학사가 한국어학사와 조선어학사로 분단된 것을 방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까지 남측은 북을 선택한 이극로를 부정하고, 유열과 홍기문을 무시하고, 김수경을 외면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숱한 북쪽의 국어학 연구자들을 금기시했다. 모든 인문학 분야가 마찬가지였다. 이에 대해서는 북쪽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남측은 조선어학회가 한글학회로 바뀐 후에 한참이 지나서야 북측의 연구자들을 간신히 소환할 수 있었다. 그것도 일부 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 덕분이었다.

국제고려학회와 남북 학술 교류

여전히 우리는 분단되어 있다. 어학사를 통합하여 기술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가능한 것이며, 반드시 이뤄야 하는 당위의 문제이다. 국어학 분야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국제고려학회는 이러한 현실적 방임과 한계 안에서 남북 학술 연구의 만남과 통합에 대한 열망이 실천적으로 구현된 학술 교류의 장이다. 그리고 남북의 연구자들은 이 교류의 장을 통해 2년에 한 번씩 함께 만나고 있다. 우여곡절도 많았고 제약도 적지 않았지만, 서로에 대한 신뢰를 토대로 공동의 학술적 교류 경험을 쌓아가고 있다. 국제적인 학회 중에서 북쪽에 ‘평양 지회’를 두고 있는 연구 단체는 국제고려학회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1986년 제1회 조선언어문화국제학술토론회(중국 베이징)를 개최한 이래 1997년 제5차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일본 오사카)까지는 ‘조선학’이라는 이름으로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코리아학’이라는 용어가 정착된 후인 2000년 제6차 회의(미국 하와이)부터는 지금의 ‘KOREA학국제학술토론회’의 명칭으로 자리를 잡았다.

필자는 2005년 제7차 KOREA학국제학술토론회(중국 선양) 이후 영국 런던, 중국 상하이, 캐나다 밴쿠버, 중국 광저우, 오스트리아 비엔나, 뉴질랜드 오클랜드, 2019년 체코 프라하에서 개최된 학회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참석하고 있다. 2017년 오클랜드 대회에서는 북쪽 학자들이 학회 참석을 위해 베이징까지 왔다가 뉴질랜드 정부의 납득하기 어려운 비자 거부로 참석하지 못했지만, 북쪽 학자들도 이 국제고려학회 행사에 깊은 관심을 두고 참여하고 있다. 남북 연구자들의 만남에 대한 그들의 열정도 우리와 다르지 않다고 필자는 감히 확신한다.

특히 2019년 제14차 KOREA학국제학술토론회(체코 프라하)는 남북 연구자들이 대규모로 참석하여 성황리에 개최된 뜻깊은 축제였다. 총회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2021년 제15차 대회를 평양에서 개최하기로 모두가 합의하기도 했다. 역사적 순간이었다. 학술대회 뒤풀이에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화답했던 기억과 사진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러나 전대미문의 전 세계적인 코로나의 대유행, 북미 관계의 경색, 남북 교류의 정체 등으로 우리의 평양행이 가로막혔고 현실적으로 올해 평양 대회 개최는 불가능했다. 학술대회는 순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고려학회의 평양 대회 준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국제고려학회에서 만난 《겨레말큰사전》

국제고려학회에서는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에서 활동하는 남북의 연구자 일꾼들도 함께 만나 학술적 교류와 친목을 꾸준히 다져왔다. 특히 북측의 전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장이자 《겨레말큰사전》 북측편찬위원장을 역임한 문영호 교수, 언어학연구소 정순기 교수(《겨레말큰사전》 북측편찬위원) 그리고 현 언어학연구소장이자, 《겨레말큰사전》 북측편찬위원장인 방정호 교수 등은 잊지 못할 학술 동학이자 동무들이다. 치열하게 토론하고,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고 수용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국제고려학회의 학술 활동 장면들은 왜 우리가 직접 만나서 이러한 교류의 장을 만들어야 하는지를 여실히 대변한다.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의 사전 공동 편찬사업도 역시 이러한 남북의 학술 연구자 일꾼들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고 소중한 합의를 지켜가면서 일군 역사적 언어 실천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국제고려학회에서는 북쪽의 연구자들과 《겨레말큰사전》 편찬을 위한 고민을 다양한 학술의 장에서 펼쳤으며 미국과 유럽의 언어학 전공자들, 중국 연변과 일본의 조선어학 연구자들 역시 함께 힘을 보태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 편찬의 온전한 완성을 위해서라도 ‘통합적인’ 우리의 학술 활동은 여전히 유효하다.

코리아학 연구와 통합의 길

우리는 어렵게 걸어온 이 길을 멈추지 말고 걸어가야 한다. 계속 만나야 한다. 만나야만 신뢰가 형성되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코리아학 학술 교류와 《겨레말큰사전》 남북 공동편찬이라는 실천적 활동을 통해 굳건하게 그 결실을 맺을 수 있다. 특히 남측의 서울, 북측의 평양에서는 반드시 국제고려학회 학술 행사가 개최되어야 한다. 국제고려학회의 본부가 있는 오사카에서도 다시 한 번 대회를 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가까운 날에 재개될 남북 학술 교류를 위해 남측에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을 중심으로 국가의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하며 무엇보다도 남북 코리아학 연구와 통합을 위한 연구자들의 끊임없는 실천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과 실천은 한 번으로 끝나는 이벤트가 아니라 남북 통합이 되기 전까지 지속적이고 항구적이어야 한다. 남과 북 모두 언어 통합의 역사적 주체로서 식민과 분단을 넘어 한길로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겨레말

유현경
이상혁
한성대학교 상상력교양대학 기초교양학부 교수,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객원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사전편찬실 선임연구원을 지냈으며 2017년부터 국제고려학회 서울지회 언어분과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어학회 연구위원, 고려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학술지 《한국학연구》 편집위원장과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학술지 《아시아문화연구》 편집위원을 맡고 있으며 동숭학술재단 감사, 훈민정음학회 학술이사, 사단법인 하나누리 이사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