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 탐구

들쭉과 블루베리

신지영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작년 초여름, 한 학기가 마무리 되어 가고 있던 때였다. 학부 강의를 마감하면서 그 강의를 듣고 있던 대학원생들과 따로 시간을 갖게 되었다. 대학원 강의는 석박사가 함께 수강하는 것이 보통이고, 강의보다는 발표와 토론을 중심으로 하는 세미나 수업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기본적인 내용을 정리하고 싶은 대학원생들의 경우는 교수자의 설명이 훨씬 많이 제공되는 학부 수업을 청강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 학기에도 여러 명의 대학원 청강생이 있었다. 그중에는 유학생도 몇 명 있었다. 그런데 유학생 중에 매우 독특한 이력을 가진 학생이 한 명 있었다. 북한의 한 대학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우리 대학원에 진학한 중국인 유학생이었다. 남쪽과 북쪽의 대학을 모두 경험한 학생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조심스럽게 그 학생에게 물었다. 아직 채 한 학기도 지나지 않았지만 남과 북에서 공부하면서 가장 다르다고 느낀 점이 무엇인지. 그 학생의 답이 매우 흥미로웠다. 그 학생은 가장 큰 차이 중 하나가 자국어에 대한 태도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왜 남쪽에서는 자신의 말을 놔두고 다른 나라말을 그렇게 많이 쓰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어서 그 학생은 우리에게 문제 하나를 내겠다고 했다. 블루베리의 고유어가 무엇인지 묻는 문제였다. ‘블루베리는 외래종인데 고유어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학생의 태도로 보아서 고유어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갑자기 너무나 궁금해졌다. 필자를 비롯해서 거기에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뭐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필자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답이 뭔지 모르겠으니 알려 달라고 재촉했다. 그 학생은 필자의 재촉에 ‘들쭉’이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우리는 모두 깜짝 놀랐다. 거기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쭉’이라는 단어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특산품으로 자주 소개된 ‘들쭉술’이 들쭉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정도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들쭉이 블루베리라니! 블루베리에 해당하는 고유어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들쭉술생각해 보니 북한을 소개하는 방송 프로그램이나 남북 정상회담 보도, 그리고 관광이나 공무로 북한을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북한의 특산물 중 하나인 들쭉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정작 들쭉술의 재료가 되는 들쭉을 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들쭉술을 소개하는 영상에서 들쭉술 상표에 있는 들쭉의 그림이나 사진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의를 크게 기울여 보지 않았으니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게다가 들쭉술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들쭉이 뭔지 그리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냥 남한에는 없고 북한에만 있는 열매 정도라고 생각하고 넘겼던 것 같다. 아마 북쪽의 들쭉술이 남쪽에서 화제가 되지 않았다면 들쭉이라는 단어를 들어 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자리를 파하고 연구실로 돌아와 들쭉과 블루베리를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검색을 하다가 들쭉술의 병에 붙어 있는 열매 그림 혹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최근 흔해진 블루베리와 똑같이 생긴, 검은빛이 나는 짙은 보라색의 동글동글하고 탱탱한 열매가 눈에 확 들어왔다. 들쭉술이 남쪽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며 소개되었던 시기에는 블루베리가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다. 그러니 상표에 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봤어도 보지 않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검색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되었다. 그렇게 검색을 해 가며 남쪽과 북쪽에서 들쭉의 의미가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선 사전을 검색하면서 남쪽과 북쪽 사전에 두 가지 차이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남쪽 사전에는 들쭉과 블루베리가 모두 올림말에 있는 반면에 북쪽 사전에는 들쭉만 있을 뿐 블루베리는 없었다. 둘째, 북쪽은 토종이든 외래종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들쭉이라고 부르는 반면에, 남쪽은 외래종과 토종의 이름이 달랐다. 외래종은 블루베리, 토종은 정금나무, 모새나무, 산앵두나무, 들쭉나무와 같이 종류별로 다양한 이름이 있었다.

들쭉과 블루베리를 검색하다가 넌출월귤과 크랜베리의 관계도 알게 되었다. 넌출월귤과 크랜베리의 관계는 들쭉과 블루베리의 관계와 유사했다. 단, 북쪽 사전에는 넌출월귤이 표제어에 없었다. 대신 월귤과 월귤나무가 표제어에 있었는데 이들은 따들죽과 같은 말이라고 안내되어 있었다. 북쪽 사전의 안내에 따르면 북쪽에서는 블루베리를 들쭉이라고 하고 크랜베리는 따들쭉(혹은 월귤)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북쪽 사전에는 크랜베리가 표제어로 올라가 있지 않았다.

이렇게 블루베리와 들쭉의 관계에 대해 확인해 가면서 앞서 우리에게 문제를 던졌던 중국 유학생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왜 남쪽은 자신의 말이 있는데 그 말을 쓰지 않고 들어온 말을 쓰느냐는 것이었다. 즉, 들쭉이라는 자신들의 단어가 분명히 있는데도 들쭉을 두고 굳이 블루베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 제기였다.

분명 블루베리를 대하는 남쪽과 북쪽의 자세는 달랐다. 남쪽은 블루베리를 그냥 받아들인 반면에 북쪽은 자신에게 있는 것과 가장 유사한 들쭉에 주목하여 들쭉이라는 말을 확대하여 사용했으니 말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차이를 들쭉이라는 단어에 대한 남쪽과 북쪽의 서로 다른 친숙도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북쪽은 고산지대가 많아 들쭉나무가 남한에 비해 훨씬 많을 테니 들쭉이라는 단어에 익숙할 수 있다. 들쭉으로 술을 담을 만큼 말이다. 반면에 남쪽에는 들쭉나무가 흔하지 않은 만큼, 들쭉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곳에 보통 외래어가 사용되는 법이니 들쭉과 블루베리의 경우는 단어에 대한 친숙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경우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설명이 유효한 경우는 오히려 소수에 불과하다. 전반적으로 남쪽의 말글 생활을 관찰해 보면 블루베리를 들쭉으로 받아들이는 북쪽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자주 목격된다. 익숙하게 사용되는 아주 친숙한 단어가 우리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외래어가 들어와 그 자리의 일부를, 혹은 전부를 차지하며 정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닭, 양념장, 조리법, 요리사 등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1980년대부터 사 먹는 닭은 점점 치킨이 되어 갔다. 특히 부위별로 나누어 튀긴 닭은 이미 닭이 아니다. 치킨이다. 닭고기가 먹고 싶은 날과 치킨이 먹고 싶은 날은 다르다. 닭고기가 먹고 싶다는 친구를 데리고 삼계탕 집에는 가도 되지만, 치킨이 먹고 싶다는 친구를 데리고 삼계탕 집에는 안 가는 것이 좋다. 치킨이 먹고 싶은 친구를 데리고 삼계탕 집에 간다면, 2002년 개봉했던 <집으로>라는 영화에서 치킨이 먹고 싶다는 손주에게 백숙을 끓여 준 할머니가 될 수도 있다.

또, 1990년대 이후로 양념장의 자리는 많이 좁아졌다. 이제 소스가 양념장의 자리를 거의 다 잠식했다. 한식 요리를 설명할 때조차도 소스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낯설지 않다. 조리법이라는 표현도 레시피에게 자리를 거의 다 내준 것 같다. 이 일이 일어나는 동안 요리사는 셰프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치킨을 즐겨 먹는 사이에,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에서 양념장의 조리법을 설명하는 요리사는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다. 소스의 레시피를 설명하는 셰프들만 등장한다.

국립국어원이 아무리 다듬은 말을 제안해도 외래어의 유입 기세는 꺾일 것 같지 않다. 사람들은 다듬은 말을 보고 뭔가 2%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듬은 말이 다듬을 말의 맛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듬은 말들은 대체로 흔히 쓰던 말들이라 차별성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서양 요리에 양념장을 쓰면 안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서양 요리에는 양념장이 아니라 소스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은 소스 대신에 양념장이라는 말을 확대해서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소스가 반대로 양념장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을 설명할 수 없다.

외래어는 우리에게 새로움과 함께 낯설고 어렵다는 인상을 준다. 새로움은 귀를 쫑긋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표현의 차별화를 통해 새로움을 부각하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가 있다.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은 주로 이런 효과를 노리고 외래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또, 전문가가 사용하는 외래어는 대체로 낯설고 어렵다는 인상을 주며 전문성을 돋보이게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 말을 듣는 비전문가는 그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 자신의 탓인 양 조심스럽다. 모른다고 말하면 무식해 보이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그 말을 탓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탓한다.

하지만 전문가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그 말을 듣고 있는 우리의 탓이 아니라 사실은 전문가의 탓이다. 전문가들의 진짜 전문성은 비전문가에게도 전문적인 내용을 쉽고 친절하게 설명할 수 있을 때 더욱 돋보이는 법이다. 또, 기자들은 자주 이런 말을 한다. 기사는 중학교 2학년이 읽을 수 있을 만큼 쉽게 써야 한다고 말이다. 이 말은 국민 모두가 쉽게 읽을 수 있게 기사를 쓰라는 뜻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기사의 문장은 짧고 간결하지만 기사에 쓰인 단어들은 낯설고 어려운 경우가 많다.

사실, 우리가 다듬은 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외래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언어 순혈주의를 고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말 때문에 정보로부터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좀 더 쉬워지려면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단어를 활용해야 한다. 그래야 그 뜻을 쉽게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블루베리를 대하는 남쪽과 북쪽의 태도를 생각하며 전문가로서 비전문가와 소통하는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알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알 수 있게 만들어야 하고,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알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전문가의 말을 듣고 당신이 모르는 것은 당신의 탓이 아니다. 당신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전문가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보통의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당신을 알지 못하게 만드는 전문가는 능력이 부족하거나 당신에게 알려 주기 싫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겨레말

신지영
신지영
런던대학교 대학원 언어학 박사. 현재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서울시 국어바르게쓰기위원회 위원, 대검찰청 과학수사 음성분석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The Sounds of Korean』(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말소리의 이해』, 『한국어의 말소리』, 『한국어 문법 여행』, 『언어의 줄다리기』 등 다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