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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창

『임꺽정』에서 『국수』까지

_ 김하수 / 겨레말큰사전 이사

  1. 국어사전과 시대정신

  사전은 그냥 우연히 출간되는 것이 아니다. 편찬자의 목적의식이 있게 마련이고 당시 사회가 원하는 시대적 요구를 배경으로 하고 나오게 마련이다. 근대 이후 출간되었던 국어사전은 당시의 시대상을 늘 반영하고 있었다.
  우리의 초창기 사전은 외국인이 만든 단어장 수준의 사전이었다. 그 이후 한국어 사전의 작업은 초창기 선구자들의 손으로 넘어온다. 조선광문회에서 착수했던 ‘말모이’는 미완으로 끝났고, 해방 이후 조선어학회의 ‘큰사전’이 이루어짐으로써 가장 기초적인 어휘 사업이 성취되었다. 또 동시에 이 시점에서 우국지사들의 손을 빌리던 국어사전 편찬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다음 단계는 ‘상품으로서의 사전’의 시대에 접어든다. 1958년의 신기철, 신용철 형제의 ‘표준국어사전’, 홍웅선, 김민수의 ‘새사전’, 이희승의 ‘국어대사전’ 등은 상업성이 강해지고 제본 수준도 높아지고 활자도 개량되었다. 그러나 상업 출판의 요구 때문에 어휘를 무리하게 늘여 의심스러운 단어들도 많이 올림말이 되었다. 그러다가 ‘프레지던트, 파더, 마더’와 같은 말까지 들어갔다. 또 효용이 의문스러운 고유명사와 외래어도 대량으로 올린 잘못된 관행을 만들었다.
  1990년대 이후에 출간된 연세대와 고려대의 사전은 학술활동이라는 명분을 내걸어 편찬지침 역시 언어학적 개념과 어휘 빈도 개념을 적용했다. 이론적으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지만 ‘시장성’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것, 그리고 국가에 의해 편찬된 ‘표준국어대사전’의 기세에 밀려 사실상 출판과 동시에 절판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과적으로 20세기 마지막 부분과 21세기 초에 국가가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은 사전을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지면서 동시에 독점도 한 셈이다. 한편으로는 국가 책임으로 사전의 신뢰도를 높인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대로 민간 주도의 사전이 그 이후 소멸되다시피 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앞으로의 사전도 역시 국가 기관이 책임지고 사후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부담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앞으로 남과 북의 협력 사업이 점점 활성화될 경우 당분간은 국가의 역할이 지금보다 커지면 커졌지 그리 약화될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겨레말큰사전》의 경우는 해외 동포들의 언어 문제에도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해외 민간 사회와의 유기적인 연동을 위해서라도 일정한 민간 부문의 인적 자원과 정보 통로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국어사전들은 근대화 이후 그 주도 세력이 변화해 왔다. 다시 말하면 사전은 사전 편찬자와 사용자 사이의 독립적 변수가 아니라 그 시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하는 일종의 시대정신과 연동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위기에서는 우국지사들에게 과제를 부여하고, 사회 안정기에는 상업화를 통해 사전의 수준과 정보의 질을 높이고 사용자에 대한 서비스를 강화했으며, 도약하는 단계에서는 학술적인 내용을 채워 넣었고, 사전의 규모가 상당히 커진 다음에는 국가 예산의 힘으로 관리되는 모습으로 변모해 온 것이다. 각 시대를 지배해 온 시대정신에 어떻게 응답했는가의 문제였다.
  2. 현 시대의 흐름과 의미

  그렇다면 《겨레말큰사전》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대적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겨레말큰사전》을 편찬한다는 것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한반도의 정치사회적 통합과 재통합 과정에 중대한 이정표이기도 하다. 난마처럼 얽혀 있는 한반도 문제는 동시에 동아시아의 문제이기도 하다. 서유럽에서 시작한 인류의 근대화 노정은 북미 대륙까지 번지고 나서 제국주의화되면서 계몽적 동력을 잃어버렸다. 다른 세력인 슬라브 문화권은 대안적인 이념으로 북유라시아와 동유럽으로 뻗어나가다가 또 자기 한계에 봉착해버렸다.
  또 다른 줄기라고 볼 수 있는 동아시아에서는 일본만이 순탄한 근대화에 성공하고 중국과 한국은 좌초된 상태를 퍽 오래 버텨야 했다. 한반도가 통일을 통해 미완의 근대화 과제를 충족한다면 동아시아는 근대화 과정을 진정 마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의 동아시아의 ‘생산력’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밀리지 않지만 그 위에 쌓아 올릴 문화적인 성취는 늘 불안정했다. 우리의 통일은 두 권력을 하나로 만드는 것 이상의 기능을 해내야 한다. 곧 체제와 문화의 통합이라는 연금술 말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세계 판세의 변화는 또 새로운 시대의 서곡을 알려 주고 있다. 곧 ‘세계화’와 ‘다극화’ 문제이다. 아직 예단하기는 어려우나 지금 전개되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바로 이 두 가지 시대정신의 반영이기도 하며, 우리 남과 북의 변화도 이에 상당 부분 연동되어 있다.
  이제 막 21세기 초반에 들어선 지금 세계의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모든 국가의 거버넌스가 위기를 겪고 있다. 그나마 안정적이던 독일의 메르켈도 퇴장을 예고했다. 세계 경제를 지탱해 주던 미국과 중국이 다투고 있다. 유럽 연합은 영국의 이탈 이후 자신의 문제 외에는 신경을 못 쓰고 있다. 일본의 태도 역시 이기적으로 흐르고 있다. 미국의 금융 위기 이후 모든 세계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상태이다. 한반도의 급격한 변화 역시 모두 부담스러워한다. 가치와 윤리의 정당성이 위기에 달했기 때문이다.
  좀 더 노력해야겠지만 머지않아 우리의 행보는 과거보다 훨씬 더 자유스러워질 것이고 정치적 선택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미국은 결국에 가서는 브레튼우즈 체제(Bretton Woods system)의 근간을 존중해 주는 조건으로 다극화를 용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전반적인 안보를 미국이 조정하되 경제적인 통제와 조율은 유럽연합, 동아시아 등이 한 몫을 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남북 협력 체제는 동아시아의 정치와 경제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한몫을 요구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아시아의 대국이 되려는 야심보다는 문화적 허브의 길을 걷는 것이 현명하다. 이렇게 우리의 앞에 놓인 시대정신은 평화적인 세계화의 도정이다. 또 그 일환으로서의 동아시아적 발전과 협력이다. 과거에 일본이 군국주의적으로 추진하다가 실패한 과오를 수정하자는 것이다.
  한국의 정보 기술, 연예, 영화, 스포츠 등이 이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기본적인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문화나 중국의 문화는 패권적 성격을 많이 띠었다. 일본은 차분하고 정밀한 기술 기반 사회로서 교육과 학문이 발전한 좋은 토양의 사회이지만 국가 권력이 지나치게 미일 안보체제에 묶여 있음으로써 자신들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주위 국가와 갈등에 쉽게 빠진다. 반면에 한국(남북)의 문화는 남을 지배해 본적이 없는 문화이다. 식민지 출신으로서 독립하여 거의 유일하게 경제적, 기술적 자립에 도달했거나 핵무기를 스스로 개발해 본 일이 있는 사회이다. 북한은 구사회주의 체제에서 코메콘에도 정식 가입을 하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걷기도 했다.
  3. 《겨레말큰사전》 이후의 《편찬사업회》

  남과 북이 이제 자신을 옥죄던 국제적 압박에서 좀 느슨해지면 함께 문화 분야에서, 특히 언어 정책과 사업 부문에서 공유할 일이 많아질 것이다. 우선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바로 언어 규범의 통일이겠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이미 양측에서 유효하게 가동 중인 언어 규범을 자유롭게 내버려 둘 필요가 있다. 상대방의 출판물이나 인터넷 자료를 공유할 수 있는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서서히 《겨레말큰사전》에서 성취한 일부 합의한 언어 규범을 조심스럽게 시행하는 것이 좋다.
  자연스럽게 사전 자체도 다양한 특성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전문용어사전, 외래어 사전, 한자어 사전, 사자성어 사전, 의미 분류 사전, 그림 사전, 어원 사전, 표기 변천 사전, 중세어 사전, 이두 사전, 지도를 곁들인 지명 사전 등등 매우 다양한 사전의 개발로 국민들에게 풍부한 언어 서비스를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주요 외국어 문헌 번역을 남과 북이 공유하거나 함께 번역 사업을 벌이는 것도 중요하다. 이미 번역한 ‘조선 실록’을 더 수준 높여 재번역을 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단계에 이르면 아주 중요한 사업이 기다릴 것이다. (가칭) ‘언어자원관리본부’ 같은 기관이 남과 북, 그리고 해외 동포 사회에서 사용하는 방언, 신어, 고전 문헌어, 일상어, 번역어 등을 조사해 상시적으로 어휘 목록과 사전 자료를 정리하고 필요에 따라 민간 기구에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정리된 전문 용어도 이곳에서 관리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더 나아가 ‘티브이’와 ‘텔레비전’이라는 변이형 가운데 어느 것의 빈도가 높은지, 혹시 지역 차이나 계층 차이는 없는지 하는 조사를 해서 출판계나 언론계, 사회통신망에 제공해 줄 필요가 있다. ‘바라다’의 명사형을 ‘바램’으로 쓰려는 세력이 얼마나 강해졌는지도 파악해 나가야 할 것이다. 가칭 ‘국어관측소’가 필요하다.
  이상의 사업은 사실 ‘국어원’의 업무와 상당 부분 겹친다. 그러나 충분히 타협과 조정이 가능하다고 본다. ‘국어원’은 국가적인 공식적인 기구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겨레말큰사전》은 그와 달리 민간부문과의 협조도 좀 더 쉬울 것 같다. 따라서 좀 거시적인 기획과 정책적 내용은 국어원이 다루고 언어자원에 관계된 자산들은 《겨레말큰사전》이 다루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그래서 ‘국어원’은 정부를 대변하고 사업을 인증하고 공식성을 비준하는 역할을 하는 데 치중하고 《겨레말큰사전》은 현장을 뛰어다니는 역할과 함께 국가 부문과 민간 부문을 엮어 주고, 국가가 팔을 뻗기 조심스러운 해외 동포 사회와의 연결망 강화 등을 맡는 것이 효율적이다.
  통일 후에도 민간 부문의 협력과 참여를 북돋는 기능을 《겨레말큰사전》과 그의 후속 수정판들이 계속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렇게 하면서 불행했던 분열의 역사를 위대한 재통합의 역사로 재탄생하게 하는 역할의 한 모퉁이를 《겨레말큰사전》이 맡아 주었으면 한다.


| 김하수 |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독일 루르대학교 어문학부 박사. 1986~2014년 연세대 교수로 재직. 2008~2013년 연세대 언어정보연구원장을 맡기도 했으며 국립국어원 언어정책부장, 한국사회언어학회 회장, 한국사전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겨레말큰사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