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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보물찾기

‘동심언어’ 속 보물찾기

_ 이정록 / 시인

-엄마는 요리왕이야.
-다 어깨너머로 배운 거야.

-아빤 만물박사야.
-다 어깨너머로 곁눈질한 거지.

-할머니는 정말 못하시는 게 없어요.
-다 어깨너머로 흉내만 내는 거야.

-어깨너머에는 별의별 것
다 가르쳐주는 학교가 있나 봐요?

…….

-배움이란, 어깨너머학교에서
마음을 모셔오는 거란다.
『어깨너머』 전문
   ‘어깨너머’란 말에는 남이 하는 것을 옆에서 보거나 들어서 깨우쳤다는 겸손함이 있다. 개구리도 꾀꼬리도 어깨너머로 배운 노래로 사랑을 한다. 참된 것은 어깨너머에서 온다. 눈과 마음을 열면 가까이에 가장 멋진 ‘어깨너머학교’가 있다. 어깨너머라는 스승이 눈을 반짝이고 있다. 그러므로 배움은 가장 가까운 것을 모시는 거다.
세계지도를 그린다.
연필이 빗나갈 때마다
몇 겹으로 덧칠해서 그렸다.
물너울이 일었다.
연필이 지나는 곳마다
거품꽃이 피었다.
세계지도를 그리는 일은
바닷가 물보라를 그리는 일이다.
메밀꽃을 피우는 일이다.
칫솔질할 때마다
내 입이 세계지도 같았다.
입술에 흰 파도가 쳤다.
내 가슴에 용암이 들끓었다.
파도처럼 부서지자.
메밀꽃처럼 새하얗게 피어나자.
세계지도를 그린다.
강강술래, 바닷가를 따라
메밀꽃이 핀다.
『메밀꽃』 전문
   물너울을 비유적으로 메밀꽃이라고 부른다. 북한에서는 파도에 실려 아래위로 오르내리는 흰 거품을 토끼뜀이라고 부른다. 바다가 토끼뜀 뛰느라고 애쓴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마음결이 환해진다. 하얀 토끼들이 어깨동무하고 뛰어노는 바닷가가 한눈에 펼쳐진다. 언어는 끊임없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다. 모든 사람에게 동심이 있기 때문이다.
   외마디부터 시작된 언어가 다양한 정보를 품으며 ‘겹낱말’로 가지를 뻗어 나갈 때, 언어학자들이 말하는 유비와 상징을 넘어서 동심이 끼어들어서 노닌다. 두 언어가 ‘범벅말’이 되는 과정에 재미가 끼어들고, 마음의 기원이 깃든다. 키득거림과 박수 소리와 어깨동무와 얼싸안음이 생동한다.
거저 얻어먹고 사는
동냥치의 더러운 주머니가 아니에요.
여물지 못한 열매가 빈 주머니가 된 거예요.
높은 자리에 꽃을 피웠다고 좋아한 적 없어요.
햇살 차곡차곡 담은 곡식 주머니가 되고 싶었어요.
씨알 좋은 열매를 선물하고 싶었어요.
늦가을 햇살이나 얻어먹는 비렁뱅이가 아니에요.
무언가 빌어가려고 서리와 눈보라를 맞으며
부르르 주머니 메고 떨고 있는 게 아니에요.
꽃을 늦게 피운 것이 제 잘못인가요.
주머니 그득한 한숨에 불을 붙여주세요.
차가운 세상에 불쏘시개가 될 거예요.
저는 이를 꽉 다문 꼬마장작이에요.
『거지주머니』 전문
   가을 참깨를 볼 때마다 애틋하다. 아래 꼬투리는 다 익어 벌어지는데 우듬지에서는 꽃망울이 맺힌다. 곧 서리가 내리고 눈보라가 흩날릴 텐데 말이다. 거지주머니는 안쓰러움에서 생겨난 말이다. 빈 꼬투리와 어린 꽃에 조시를 바치고 싶다. 동심이 없으면 언어는 빛나지 않는다. 낱말과 낱말이 만날 때 둘은 어린아이처럼 껴안는다. 언어는 동심의 놀이터다. 태초에 동심이 있었다. 나는 이것을 ‘동심언어’라고 이름 붙였다.
   316편을 묶은 『동심언어사전』은 시의 형식을 빌렸다. 북한말을 포함해서 순우리말로 된 복합어가 주를 이룬다. 복합어는 우리말로 '겹낱말'이나 '범벅말'이라고 한다. ‘만남언어’나 ‘팔짱언어’라고 불러도 좋겠다.
환갑이 넘으면
남의나이를 먹는다고 한다.
허망하게 죽은 젊은이와
한 몸이 되어 황혼 길을 걷는다.
다시 맞은 봄으로
사랑을 불태우기도 한다.

팔순이 지나면
남의나이를 모신다고 한다.
기저귀 차고 떠난 젖먹이와
둥개둥개 한몸이 된다.
때도 없이 어리광을 부리고
떼쓰기와 삐치기와 사탕을 좋아한다.
아예 똥오줌도 못 가리는
갓난아이로 돌아간다.

그래서 영혼은
모두다 동갑내기 벗이 된다.
『남의나이』 전문
   내 시 쓰기는 얕고 보잘것없으나, ‘팔짱언어’에 서려 있는 오랜 사람들의 입김을 믿었다. 언어에는 인간 본성의 따듯함과 사랑이 녹아있다. 약손이 되고 꽃향기가 퍼진다. 재미와 감동이 아니면 꺼져버리는 ‘만남언어’와 숨바꼭질했다. 아이가 문구멍으로 세상을 내다본다. 동심에는 침이 묻은 손가락이 있다. 키가 자라는 문구멍이 있다. 반짝이는 작은 눈동자와 빛나는 너른 세상이 있다.

| 이정록 |

1964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였으며,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됐다. 그 동안 동심언어사전,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아버지학교,어머니학교,정말,의자란 시집과 시인의 서랍이란 산문집을 출간했으며 대단한 단추들,미술왕,십 원짜리 똥탑이라는 동화책과 지구의 맛,저 많이 컸죠,콧구멍만 바쁘다라는 동시집을 펴냈다. 또한, 청소년시집 까짓것달팽이 학교,똥방패라는 그림책을 냈다. 박재삼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김달진문학상,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