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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말 북녘말

여름엔 청량음료를

_ 고대영 / 겨레말큰사전 선임연구원

어김없이 또, 여름이다. 햇살은 찬란하고 젊음은 그 강렬한 빛 아래 반짝인다. 자외선도 무섭지 않고 구릿빛으로 칠해 놓은 육체는 건강함으로 무장하고 있는 듯하다. 여름 볕이란 너무도 눈부신 탓에 그늘 한 쪽도 남기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어느 건물이든 조각 그늘을 만들고 그곳에 볕을 피해 한 떼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게 마련이다. 젊음의 정점을 찍고 이젠 하향 그래프를 타고 미끄러지고 있는 중년들이 그늘 아래서 나름의 방식으로 여름을 즐긴다. 이때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맥주’다.
광고의 그것처럼 목울대를 힘차게 움직이며 맥주를 원샷하는 것도 좋겠지만 이건 그늘의 음주법이 아니다. 차가운 잔에 가볍게 입을 대고 한 모금씩 천천히 탄산과 알코올의 맛을 음미하는 것이다. 느긋한 여유 속에서 시곗바늘이 시나브로 거꾸로 돌기 시작하고 모금마다 과거의 여름을 추억하게 된다.
어느 해 여름, 조별로 맡은 사전 원고를 껴안고 남북의 편찬원들이 씨름을 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일이지만 사전 풀이에 대한 관점 차이와 남북의 언어 차이로 비지땀이 절로 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단 한 마디의 말실수로 회의 자체가 중지되는 일도 있었다니 협의를 하는 중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되었다. 그건 북측 편찬원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렇게 긴장의 순간들을 끝내고 만찬 때의 일이다.
협의 마지막 날, 남북의 편찬원들이 모여 만찬을 즐겼다. 가볍게 잔이 오가고 긴장이 알코올에 소독되기 시작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던 중 옆자리에 있던 나이 지긋한, 북측 여자 편찬원께 ‘평양주’을 권했다. 북측의 ‘평양주’는 소주(증류주)의 일종으로 알코올 도수가 30~40도에 이른다. 그러자 그 편찬원께서 “여자가 어떻게 술을 마십니까?”라고 되물으시며 사양을 하셨다. 그러곤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고 곱게 한 모금을 마시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맥주도 술인데 …. 내가 싫으셨던 것일까? 옹심에 “맥주도 술인데요.”라고 한 마디 거들었더니 그분께서 “술이라니요? 청량음료지요.”라고 대꾸하셨다. 청량음료?
남북의 사전에서 ‘술’과 ‘청량음료’를 찾아보자.
표준국어대사전 조선말대사전
청량음료
(淸凉飮料)
이산화 탄소가 들어 있어 맛이 산뜻하고 시원한 음료를 통틀어 이르는 말. 사이다, 콜라 따위가 있다. 맛이 시원하고 상쾌한 기분이 나게 하는 《사이다, 과일단물, 약수, 탄산수, 신젖단물, 맥주 같은것》을 통털어 이르는 말.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어 마시면 취하는 음료. 적당히 마시면 물질대사를 높이는 효과가 있다. 맥주, 청주, 막걸리 따위의 발효주와 소주, 고량주, 위스키 따위의 증류주가 있으며, 과실이나 약제를 알코올과 혼합하여 만드는 혼성주도 있다. <알콜성분이 들어있는 마시는 액체>를 통털어 이르는 말.
《조선말대사전》에 따르면, 술은 ‘알코올’이 들어 있는 음료이고 청량음료는 청량감을 주는 음료다. 그런데 청량음료의 예시로 당당히 ‘맥주’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논리상으로야 알코올의 유무가 청량음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니 맥주를 청량음료라고 분류하는 데 굳이 이견을 달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맥주는 술의 뜻풀이대로 ‘알코올’이 들어 있는 음료가 아닌가. 그러니 당연히 술이어야 할 터인데 북에서는 술이 아니란다. 북에서는 남에서 소위 ‘독주’라고 할 만한 높은 도수의 알코올 음료만을 술이라고 하고 맥주처럼 낮은 도수인 경우에는 술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맥주가 청량음료인 것처럼! 북에서는 음료와 맥주를 파는 가게도 ‘청량음료점’이라고 한다.
햇빛이 기울어지고 상념도 잦아들고 맥주의 냉기도 가셨다. 미지근한 맥주를 더 마시기 싫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면서 문득 ‘대동강 맥주’가 간절해진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대동강 맥주는 라거로서 우리 입맛에 참 잘 맞는 것 같다. 언젠가 옥류관에서 선주후면할 날을 고대하며 그늘을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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