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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말은 겨레얼 입니다 겨레말큰사전 누리판 2017.01

새로 찾은 겨레말

-시키다

_ 이길재 / 겨레말큰사전 새어휘부 부장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말, 금수저! ‘수저론’이 2015년 경부터 한국 사회에서 주목을 받게 되면서 등장한 말이 ‘금수저’이다. 서구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야 하는데, 서구 사회에서는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야 하는 모양이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 급기야 최근 들어서는 ‘흙수저’마저 등장했다.
   한민국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거대 로펌 헌정의 공동 대표 이주승의 외동딸인 민아는, 소위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행운아다.《정수현: 그녀가 죽길 바라다》
   상고를 나와 독학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그는 성공한 {흙수저의} 전형이었다.《매일경제: 2016. 12. 8.》
   인간계에서 뿐만 아니라 ‘사전계’에도 ‘금수저’와 ‘흙수저’가 존재한다. 사람이 태어나면 출생신고를 마쳐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격을 갖게 되는 법, 단어들도 태어나 사전에 그 적을 올려야 비로소 떳떳해지는 법이다. ‘-하다’ 꼬리표를 갖는 녀석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셈이지만, ‘-시키다’ 꼬리표를 갖는 녀석들은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불운한 녀석들이다.

가결시키다, 공부시키다, 내재화시키다, 대령시키다, 등판시키다, 마취시키다, 몰락시키다,

무효화시키다, 방전시키다, 부과시키다, 사형시키다, 안장시키다, 연습시키다, 응고시키다,

이전시키다, 입금시키다, 저장시키다, 주차시키다, 착륙시키다, 침식시키다, 파기시키다,

파손시키다, 폐위시키다, 포진시키다, 표현시키다, 피난시키다, 함양시키다, 합성시키다,

해직시키다…
   ‘-시키다’가 결합된 동사들은 2006년에 간행된 《연세 한국어사전》이 나오기 전까지는 사전에 올라본 적이 거의 없다. 1942년에 간행된 문세영의 《수정증보 조선어사전》에는 ‘격리시키다, 망신시키다, 폐시키다’가 실려 있었으나, 1962년에 간행된 《조선말사전》에는 이마저도 사라지고 ‘폐시키다’만 올라 있다. 이후 《금성 국어대사전》(1991)에는 ‘안다미시키다, 폐시키다’, 《우리말큰사전》(1992)에는 ‘안다미시키다, 삭은내시키다, 출경시키다, 폐시키다’, 《표준국어대사전》(1999)에는 ‘안다미시키다’만 실려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후 《연세 한국어사전》(2006)에는 300여 개, 《고려대 한국어대사전》(2009)에는 500여 개가 실리게 된다. ‘-시키다’류가 사전에 실리지 못한 것은 ‘-받다, -당하다’류와 같이 생산적인 접사의 결합이라는 미명 아래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싶다.
   《표준국어대사전》(1999)에 의하면 ‘-시키다’는 ‘(일부 명사 뒤에 붙어) ’사동‘의 뜻을 더하고 ’사동사‘를 만드는 접미사이다. ‘사동사’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동작이나 행동을 하게 함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국어에서 사동화는 대개 세 가지 방식으로 실현된다. 사동 접미사(-이-, -히-, -기-, -리-, -우-, -구-, -추-)와 접미사 ‘-시키다’에 의해 실현되는 경우와 ‘-게 하다’와 같이 통사적 구성에 의하여 실현되는 경우이다.
   그런데 ‘-시키다’가 결합된 동사들이 반드시 ‘사동’으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시키다’류 동사들은 대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유형 1]    자기의 학비로써 상대방을 {공부시키고}, 그렇게 한 상대방이 고등 고시에 합격하자 부자집 딸과 결혼해 버린……《이병주: 행복어 사전》
   자식을 {교육시키는} 일에 지나치게 열성적인 여자도 있다.《김동길 외: 결혼과 성》

[유형 2]    나는 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주차시키고} 깊은 숨을 쉬었다.《신경숙: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대회는 이틀 동안에 걸쳐 회순에 따라 발표된 각 부문 일반 보고에 대해 결정서를 채택했는데 임화가 낭독한 초안을 수정없이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이병주: 지리산》

[유형 3]    사하라에서 동심으로 돌아가 야수들 가까이 달려가며 촬영사진을 찍는 원시적인 드릴이 잠시 나를 고통에서 {외면시켜} 주었다.《손장순: 불타는 빙벽》
   그녀에게 후배 여직원들을 {감독시키는} 역할을 주었고, 그리고 일관되게 격려하고 칭찬했다는 거야.《조관일: 조관일의 고객죽이기》
   [유형 1]은 ‘-시키다’류의 동사가 ‘사동’의 의미를 넘어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다’처럼 파생 의미를 갖는 경우이며, [유형 2]는 ‘사동’의 의미보다는 주로 ‘능동’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서, ‘주차시키다’를 ‘주차하다’로 치환이 가능하다.
철수가 차를 {주차시켰다}.
철수가 차를 {주차했다}.
   흔히 [유형 2]는 ‘-시키다’류 동사의 ‘오용 사례’로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유형 2]를 단순히 ‘오용’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언어 사용’에 대한 언중의 의식을 언어학적 사실만으로 예단하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가령, ‘감금시키다, 구속시키다’ 등은 ‘사동’의 의미가 아닌 ‘능동’의 의미로만 사용된다. [유형 2]가 주로 ‘능동’ 혹은 ‘능동’의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은 ‘-시키다’와 결합되는 명사가 ‘주차(駐車)’, ‘구속(拘束)’ 등이 의미상으로 주차하는 대상인 ‘차’, 구속하는 대상인 ‘사람’ 즉, 그 대상(theme)을 이미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1)
경찰이 범인을 구속했다.
경찰이 범인을 구속시켰다(=구속했다).
*검찰이 경찰에게 범인을 구속시켰다. cf. 검찰이 경찰에게 범인을 구속시키게 했다.
   ‘검찰이 경찰에게 범인을 구속시켰다’는 부자연스럽지만, ‘검찰이 경찰에게 범인을 구속시키게 했다’는 오히려 전자보다 자연스럽다. 이는 ‘구속시키다’가 사동의 의미로는 사용될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구속시키다’는 사동접미사 ‘-시키다’가 결합되었지만 사동의 의미로는 쓰이지 못하는 것이다(검찰이 경찰에게 범인을 구속하게 했다). [유형 2]와 같은 언어 사용은 남측뿐만 아니라 북측이나 중국의 우리 동포들의 언어 사회에서도 두루 발견된다.
주차장들이 있고 경기장기단차고가 있으며 경기장둘레에는 80여m의 폭으로 포장되여있기
때문에 이곳들에 6천여대의 자동차들을 {주차시킬수} 있다.《림승칠: 5월1일 경기장, 북측》
김룡은 하는수 없이 차를 길옆에 {주차시켜놓고} 머리를 떨구어버렸다.《정용호: 리별, 중국》
   [유형 3]은 ‘-시키다’류의 동사들이 ‘사동’의 의미로만 쓰이는 경우이다. [유형 3]과 같은 ‘-시키다’류의 동사들은 [유형 1, 2]와 같은 쓰임을 찾아 볼 수 없다. 가령, ‘그는 처음부터 이번 영화를 감독했다’는 가능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이번 영화를 감독시켰다’는 불가능하다.
   《겨레말큰사전》에서 ‘-시키다’류의 동사는 1,000여 개 이상 조사되었다. 최근에 간행된 국어사전에서는 ‘-시키다’류의 동사를 올림말로 수록하는 것이 대세이다. 《연세 한국어사전》이 그렇고,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이 그렇다. 두 사전에 올라 있는 ‘-시키다’류의 동사들은 대개 [유형 1]과 [유형 2]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겨레말큰사전》에서도 북측과의 합의를 통해 위의 두 사전처럼 [유형 1, 2]의 ‘-시키다’류의 동사들을 올림말로 수록하거나, 어휘 유형에 관계없이 일정 사용 빈도를 확보한 어휘들을 중심으로 수록하는 방안을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1) ‘감금시키다, 구속시키다’ 등은 사동주(문장에서 제3의 대상에게 동작이나 행동을 하게 하는 주체)를 소환하지 못한다. 따라서 ‘사동’의 의미로 쓰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 이길재 |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새어휘부 부장. 전북대학교 대학원 국어학 박사. 전북대 인문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 호남문화정보시스템 책임연구원 등을 지냈으며 논문으로는 <전이지대의 언어 변이 연구>, <전라방언의 중방언권 설정을 위한 인문지리학적 접근> 등이 있고, 저서로는 언어와 대중매체, 지명으로 보는 전주 백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