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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말은 겨레얼 입니다 겨레말큰사전 누리판 2016.03

우리말 보물찾기

성냥 한 개비가 들려준 이야기

_ 이상배 / 동화작가

   이 이야기는 아주 먼 옛날, 한 성냥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캄캄한 밤, 우리가 귀잠이 들어 있을 때, 부엌에서의 일이었지요.
   한 통의 성냥이 있었습니다. 여러 개비의 성냥은 저마다 태어난 곳이 달랐습니다. 그중 한 성냥개비가 태어난 집은 숲속의 소나무였습니다. 성냥개비는 자기 집이 숲속에서 제일 큰 나무였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나는 아침마다 다이아몬드 같은 차를 마셨답니다. 다이아몬드 차가 어떤 차냐고요? 수정처럼 맑은 이슬을 말하는 거죠. 날씨가 맑은 날은 온종일 따사로운 햇살을 온 몸에 받으며 새들의 노랫소리를 들었지요. 우리 집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초록빛이었어요. 아, 그런 어느 날이었어요. 한 나무꾼이 다가와 말했어요. “이 녀석 잘 자랐구나.” 그 말은 내가 소나무로 마지막 들은 말이었어요. 곧 우리 집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어요. 굵은 몸통은 큰 배의 돛대가 되고 조각이 난 가지들은 불을 일으키는 성냥이 되었지요.”
   성냥의 이야기가 끝나자 옆에 있던 걱정꾸러기 쇠냄비가 말문을 열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루에도 몇 번이고 불에 데고 물에 씻기며 지내 왔습니다. 나는 어떤 일이든지 침착하게 해 나가려고 해요. 하지만 펄펄 끓어 뜨거워지면 걱정이 앞서요. 누군가 데면 어떡하나 하고요.”
   “참, 생김새와는 다르게 복성스럽기도 하네요.”
   모지랑이가 다 된 밥주걱이 쇠냄비를 칭찬해 주었습니다.
   “지금 내 희망은 식사가 끝나면 깨끗하게 씻어져 이 선반에 올라와 여러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비록 바깥세상에 나갈 일도 없고 한 곳에 갇혀 있는 맹문이지만 세상 소식은 누구보다 잘 알지요. 시장에 다녀 온 장바구니가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거든요.”
   쇠냄비의 얘기가 끝나자 나무젓가락이 나섰습니다.
   “시끄러운 얘기 그만하고 신나게 춤추고 즐겁게 놀아봅시다.”
   “아이고, 한밤중에 정신없어요.”
   얌전이 질냄비가 나섰습니다.
   “춤보다는 즐거운 추억 얘기해요. 내가 먼저 하겠습니다.”
   “그게 좋아요, 어서 시작해요.”
   반들반들한 접시가 재촉했습니다.
   “나는 바다가 보이는 조용한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깨끗하고 분위기 있는 그 집은 언제나 가구들이 반들반들 윤이 나게 닦이고, 커튼은 주일마다 새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오, 재미있는 이야기 같은데. 목소리도 예쁘고 깨끗한걸.”
   물을 자주 쏟는 덜렁쇠 물통이 철썩 물을 튀기며 좋아했습니다.
   질냄비는 조용조용,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질냄비의 추억 얘기가 끝나자 나무젓가락이 다시 나섰습니다.
   “난 춤추는 게 젤 좋아.”
   나무젓가락이 엇송아지처럼 한바탕 춤을 추었습니다.
   다음은 차를 끓이는 주전자가 노래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안돼요. 끓인 차가 가득 들어 있어요. 나는 노래를 하려면 차를 끓일 때 저절로 하거든요.”
   그때 누구하고나 구순한 바가지가 나섰습니다.
   “차 주전자가 노래를 못할 사정이라면 밖에 있는 새가 부르면 되지요. 새장에 소리가 고운 새가 있잖아요.”
   “그건 좀 생각해 봐야 해요.”
   차 주전자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우리들 시간인데 자고 있는 새를 깨우면 안 되지요. 장바구니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장바구니가 목소리를 깔고 말했습니다.
   “지금 시간이 달구리인데 이만큼 놀았으면 됐지요. 나는 곧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엌은 항상 잘 정돈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때 부엌문이 열렸습니다. 일하는 아주머니가 들어왔습니다. 모두 조용해졌습니다. 자기가 제일 얌전한 체하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때 아주머니가 성냥 한 개비를 긁어 불을 켰습니다. 주위가 환하게 밝아졌습니다.
   “자, 모두 보았지. 제일 훌륭한 건 역시 불꽃이라고!”
   불꽃이 타버리자 주위는 다시 어두워졌습니다.

   이것으로 성냥 한 개비가 한 얘기가 끝났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캄캄한 부엌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 들지요.
   우리가 늘 쓰는 부엌의 기구들도 이렇게 각자 자존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습니다.
   옛 추억도 있고,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면서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동화에 나오는 순우리말


귀잠: 아주 깊이 든 잠.
개비: (수량을 나타내는 말 뒤에 쓰여) 가늘고 짤막하게 쪼갠 토막을 세는 단위.
걱정꾸러기: 늘 걱정이 많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복성스럽다: 생김새가 모난 데가 없이 둥그스름하고 도톰하여 복이 있을 듯하다.
모지랑이: 오래 써서 끝이 닳아 떨어진 물건.
바깥세상: 한곳에 틀어박혀 있거나 갇혀 있는 사람이 일반 사람들의 활동하는 사회를 이르는 말.
맹문이: 일의 옳고 그름이나 경위도 모르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한밤중: 깊은 밤.
얌전이: 얌전한 사람.
덜렁쇠: 침착하지 못하고 몹시 덤벙거리는 사람.
엇송아지: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송아지.
구순하다: 서로 사귀거나 지내는데 사이가 좋아 화목하다.
달구리: 이른 새벽의 닭이 울 때.

| 이상배 |

동화작가. 한국아동문학인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도서출판 좋은꿈 대표이다. 대한민국문학상, 윤석중문학상, 방정환문학상, 한국동화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저서로는책읽는 도깨비,책귀신 세종대왕,부엌새 아저씨,우리말 동화,우리말 바루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