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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말은 겨레얼 입니다 겨레말큰사전 누리판 2016.03

우리말 보물찾기

버드나무의 일생

_ 이상배 / 동화작가

   바람이 많은 계절입니다.
   꽃샘잎샘에도 양지바른 산자락에 참꽃이 피었지만 다른 나무들은 이제 겨우 파릇한 새순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겨우내 죽은 듯이 앙상했던 나무들은 머지않아 꽃기운을 타고 푸르러질 것입니다.
   나무가 이렇듯이 우리 국어사전에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죽은 듯이 잠자고 있습니다. 살려 쓰면 새로 피는 푸른 잎처럼 ‘새롭네’, ‘예쁘네’ 하고 더 아름답게 빛날 것입니다.
   나무의 일생을 그린 동화 한 편으로 순우리말을 살려 봅니다.

   따뜻한 봄입니다.
   농부가 버드나무 가지 열 개를 잘라 텃밭 가에 심었습니다.
   얼마 후, 아홉 개의 버드나무에서 싹이 돋아났습니다.
   “오, 이런 일이!”
   농부는 버드나무가 살아난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그러나 농사일이 바빠지면서 버드나무를 돌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싹이 난 버드나무를 염소들이 갉아먹어서 다섯 그루만 자랐습니다.
   한여름이 되자 버드나무는 제법 이파리가 피고 나무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염소들은 어린 버드나무를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음, 보드랍고 달곰해!”
   잎이고 껍질이고 다 갉아먹어버렸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어서는 달랑 한 그루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은 나무는 이제 염소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잎과 가지를 갉아먹어도 뿌리와 가지가 튼튼하여 끄덕없습니다.
   버드나무는 강더위를 이기고, 강추위를 견디고 튼튼하게 자랐습니다. 밑동이 굵어지고 죽죽 가지를 쳤습니다. 벌들이 붕붕대며 집을 짓고 꿀을 모았습니다.
   농부는 꿀을 받아 이웃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꿀맛이라고 하더니 정말 달고 맛있구나! 버드나무를 심기 잘했지. 죽은 나무가 아깝긴 하지만.”
   농부는 자신의 키보다 훨씬 자란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며 흡족해 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버드나무는 아름드리가 되었습니다.
   농부의 손주들이 나무에 올라가 놀고, 식구들은 그늘에서 쉬면서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버드나무는 쑥쑥 더 자랐습니다. 그러는 동안 처음 버드나무를 심었던 농부는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이 주인이 되었습니다.
   새 주인이 된 아들은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땔감으로 쓰기도 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들도 나이가 들어 죽었습니다. 집이 헐리고 마을도 옮겨갔습니다. 이제 버드나무는 허허 벌판이 된 자리에 홀로 서 있습니다.
   주인이 없어지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와 가지를 잘라 땔감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래도 버드나무는 계속 자랐습니다. 어느 여름에는 벼락을 맞아 우듬지가 타버렸지만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버드나무는 더 많은 잎을 피우고 가지를 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농부가 톱을 가지고 와서 굵은 가지를 잘라 버렸습니다.
   “벌통을 만들면 좋겠군.”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을 맞았습니다. 늙고 꺾인 버드나무가 올해도 속잎을 틔울까?
   벼락을 맞아 구멍이 뚫리고, 가지가 잘리고, 밑동만 남아있는 모습은 이제 수명이 다한 것 같았습니다.
   어느 해 봄, 아이들이 버드나무 터로 놀러 나왔습니다.
   들바람이 아직은 쌀쌀했습니다. 한 아이가 모닥불을 피우자고 했습니다. 여기저기서 검불을 긁어모아 버드나무 밑동에 쌓았습니다. 나무에 불을 질렀습니다. 아이들은 좋아라하고 불가에 모여들었습니다.
   모닥불은 오래 탔습니다. 버드나무의 밑동에서 수액이 흘러나와 불길을 세게 살려주었습니다. 그래도 버드나무는 이렇다 저렇다 불평이 없습니다.
   모닥불이 사그라지자 아이들은 가버렸습니다. 벌판에는 시커먼 버드나무 밑동만이 덩그러니 남았습니다.
   그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왔습니다. 오랜 세월 대대로 버드나무 가지에 둥지를 틀었던 까치였습니다.
   까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버드나무님, 타다 남은 그루터기가 되었구려. 마음성이 그리 좋으셔서 이제
다 주었으니 후회 없지요.”
   버드나무가 대답했습니다.
   “후회는 무슨…처음부터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잖아!”

*동화 속의 순우리말 뜻


꽃샘잎샘: 이른 봄, 꽃과 잎이 필 무렵에 추워짐. 또는 그런 추위.
참꽃: 먹는 꽃이라는 뜻으로, ‘진달래’를 개꽃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새순: 새로 돋아나는 순.
꽃기운: 사춘기에 솟아나는 기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달곰하다: 감칠맛이 있게 달다.
강더위: 오랫동안 가물고 찌는 더위.
아름드리: 둘레가 한 아름이 넘는 것을 나타내는 말.
웃음꽃: 꽃이 피어나듯 환하고 즐겁게 웃는 웃음이나 웃음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우듬지: 나무의 꼭대기 줄기.
속잎: 풀이나 나무의 우듬지 속에서 새로 돋아나는 잎.
들바람: 들에서 부는 바람.
검불: 가느다란 마른 나뭇가지, 마른 풀, 낙엽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마음성: 마음을 쓰는 성질.

| 이상배 |

동화작가. 한국아동문학인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도서출판 좋은꿈 대표이다. 대한민국문학상, 윤석중문학상, 방정환문학상, 한국동화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저서로는책읽는 도깨비,책귀신 세종대왕,부엌새 아저씨,우리말 동화,우리말 바루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