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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말은 겨레얼 입니다 겨레말큰사전 누리판 2014.03

우리말 보물찾기

아름다운 말은 쉽다― 한국말사전이 살릴 말

_ 이상배 / 동화작가

    우리말은 그 이름씨가 아름다우면서 순박하다. 글을 쓸 때, 도시를 배경으로 한 글보다 시골 정경, 시골 사람, 시골에서 있음직한 사건을 그릴 때 순 우리말을 쓰기가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문명기기가 발달한 지금보다는 옛날의 순박한 시절을 그릴 때 더욱 우리말은 빛을 낸다.
   저자는 농촌을 배경으로 한 동화를 여러 편 썼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인물이나 사건들. 그 동화 속으로 우리 말 여행을 떠나본다.
   ‘남쪽으로 확 트여 펼쳐진 펀더기에 누런 곡식들이 거두어지고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푸서리에서 그토록 울던 풀벌레소리도 뚝 그쳤습니다. 그 많던 풀벌레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뒷동산에 올라보면 저 멀리 휘뚤휘뚤 들판을 감아 돈 들길에도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은행골에 가을걷이가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일요일. 조무래기들이 머리를 깎는 날입니다. 추위가 오기 전에 몽구리로 깎아야 합니다. 진짜 추워지면 머리가 길어서 조금이라도 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번호를 정하고, 비석치기나 고무줄놀이를 하며 순서를 기다립니다.
   “아이고야, 이녀석 머리에 쇠딱지 좀 봐라. 두 겹은 앉았구먼. 도랑에 가서 차돌멩이로 박박 벗겨 내거라.”
   까까중머리가 된 아이들은 박골 저수지의 도랑으로 달려갑니다. 아저씨 말대로 머리에 덕지덕지 앉은 쇠딱지를 벗겨 내기 위해서입니다. 여름내 산과 들판으로 뛰어다니다 보면 머리에 때가 끼여 마른 쇠똥처럼 딱지가 앉습니다.
   아이들은 양잿물로 만든 빨랫비누를 머리에 비비고 얼얼하도록 벅벅 긁어댑니다. 이렇게 은행골 아이들은 머리를 깎고 양잿물 비누에 머리 쇠딱지를 씻어 내는 것으로 긴 겨울 준비를 합니다.
   동구 밖의 은행나무는 주렁주렁 열었던 열매가 다 털렸습니다. 찬 서리에 오가리가 든 은행잎들이 팔랑거리다가 떨어집니다. 머지않아 이파리는 한 잎도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된바람이 불어오면 앙상한 가지들은 휙휙 쇳소리를 내며 떨게 될 것입니다.
   새순이 돋는 봄이 언제 올까? 늙은 은행나무는 죽은 듯이 한겨울을 보내고 정말 신기하게 다시금 수많은 잎을 피울 것입니다. 잎이 무성하면 곧 새들이 날아와 고운 소리로 지저귀고, 옹두리 속 구멍에 집을 짓습니다. 새들은 여름 내 은행나무 가지 숲에서 살았습니다.
   아이들은 은행나무 가지에서 태어나 나는 연습을 하는 열쭝이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모릅니다. 어쩌다 바닥으로 떨어진 열쭝이들을 아이들은 조심스레 손바닥에 받쳐 들고 둥지로 올려다 주곤 하였습니다.
   부등깃으로 날갯짓하며 짹짹거리던 열쭝이들은 다 어른이 되어 어디인가로 떠나 버렸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어른이 된 그 새들이 다시 날아와 또 다른 열쭝이들을 낳고 기르겠지요.
   지난 여름은 몹시 더웠습니다. 살갗이 타는 듯한 뙤약볕에도 또래들은 가만있지를 못하고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습니다. 어느 날은 산에서 장대 같은 소낙비를 만나 물초가 되어서도 시원하다고 깔깔대고 웃었습니다.
   또래들은 일 년 사이에 덩치가 부쩍 커지고 어른스러워졌습니다. 찌러기를 맡아 기른 금동이는 내년에 중학교에 들어갑니다. 금동이는 중학교 입학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찌러기가 아주 큰 황소가 되었으니까요.
   금동이네뿐 아니라 은행골에는 부사리들이 많습니다. 여름내 일하며 잘 먹은 소들이 몸집이 커진데다 이제 할 일이 없다보니 자꾸 머리로 받으려 합니다. 일을 안 하니 근질근질한가 봅니다.
   장터에서 돌아오다가 왕도깨비와 씨름을 벌였던 억수 아저씨는 겨울이 싫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일거리가 있거든요. 눈이 내려 쌓이면 뒷산에 올라가 사냥을 하는 것입니다. 매나니로 산 짐승을 때려잡은 억수 아저씨는 올해는 어떤 짐승을 잡을까? 억수 아저씨는 사냥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올가미도 만들고 나무칼을 만들기도 합니다.
   또래들 동수, 승규, 바우, 길동, 두남이, 용우 들은 요즘 부지런히 쇠똥을 주워 모으고 있습니다. 논틀밭틀을 헤매며 바싹 마른 쇠똥을 자루 담아 날랐습니다. 무엇에 쓰냐고요? 음력 새해가 되면 정월 대보름 명절이 다가옵니다. 그 때 쥐불싸움이 벌어집니다. 마른 쇠똥을 누가 많이 갈무리하는가에 따라 싸움의 승패가 갈리게 되지요. 쇠똥이 쥐불의 불씨이기 때문입니다.
   뒷산 어둑한 동굴에 사는 도깨비들은 추운 겨울이 싫답니다. 밖에 사람들이 없어 심심하기 때문입니다. 돋을볕이 그리운 아이들이 바람을 막아 주는 담벼락 양지바른 곳에 모입니다. 가위바위보를 외치며 말타기 놀이를 합니다. 분명 보를 내려고 했는데 가위가 나오고, 튼튼한 말인데 와르르 힘없이 무너집니다. 심심한 도깨비들이 신통력으로 장난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은행골은 또래들의 고향이자 천국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과 함께 어우러져 뒹굴 수 있는 땅입니다. 그래서 또래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 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도깨비들도 수풀을 떠나지 않고 새봄을 기다립니다.

*동화에 나오는 순우리말의 뜻

펀더기: 넓은 들.
푸서리: 잡초가 무성한 땅.
휘뚤휘뚤: 길 따위가 이리저리 구불구불한 모양.
조무래기: 어린 아이들을 일컫는 말.
몽구리: 바싹 깎은 머리.
쇠딱지: 어린아이의 머리에 덕지덕지 눌어붙은 때
도랑: 매우 좁고 작은 개울.
까까중머리: ‘까까머리’를 놀림조로 이르는 말.
덕지덕지: 때나 먼지가 많이 낀 모양.
오가리: 식물의 잎이 병들어 말라 쪼글쪼글한 상태.
된바람: 매섭게 부는 바람.
옹두리: 나무의 가지가 병들거나 벌레가 파서 결이 맺히어 불퉁해진 부분.
열쭝이: 겨우 날기 시작한 새끼 새.
부등깃: 갓난 날짐승 새끼의 덜 자란 깃.
물초: 온통 물에 젖은 상태, 또는 그 모양.
찌러기: 성질이 몹시 사나운 황소.
부사리: 머리로 잘 받는 버릇이 있는 황소.
매나니: 무슨 일을 할 때 아무 도구도 가지지 아니하고 맨손뿐인 것.
논틀밭틀: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따라 꼬불꼬불하고 좁게 뻗은 길.
갈무리: 물건 따위를 잘 정리하거나 간수함.
돋을볕: 아침 해가 솟아오를 때의 첫 햇살.

| 이상배 |

동화작가. 낸 책으로 『 책읽는 도깨비』, 『 책귀신 세종대왕』, 『 부엌새 아저씨』, 『 우리말 동화』, 『 우리말 바루기』 외 여러 권이 있으며, 대한민국문학상, 윤석중문학상, 방정환문학상, 한국동화문학상 등을 받았다. 한국아동문학인협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도서출판 좋은꿈 대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