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한글창제, 남북 공동 서체

한글의 미학 표현할 디지털 공동 기술 개발에 나서야

장주식 ㈜LEXITECH 대표이사

《겨레말큰사전》을 편찬하는 것은 분단으로 한 민족이 그 문화적 동질성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민족간에 발생할 정신적 괴리 현상의 심화를 최대한 방지하고자 하는 민족적 노력으로써 이루어야 할 중차대한 일이며, 한민족 지식인들에게 주어진 민족적인 사명이라 할 수 있다. 이와 아울러 말과 함께 그 말을 새기는 글자에 있어서도 그 문화적 동질성을 갖출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다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화적 동질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바탕으로 남북이 공동으로 사용할 서체가 새로 개발되어야 하는 당연한 이유는 일제 강점기로 인한 문화적 분열을 회복하고자 공동으로 합의된 큰사전을 마련하는 일에 반대가 있을 수 없듯이, 공동 서체 제작 또한 상호간의 이데올로기 마찰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과학적 협업으로써 민족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글 활자체는 일제 강점기 시대의 납 활자에서부터 1980년대 사진식자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인쇄 기술을 그 토양으로 하여 발전되어 왔고 1990년대 들어 디지털 기술로 다양한 활자체를 개발해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진정한 우리의 문화적 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완성도있게 만들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 활자체를 선뜻 내놓을 수 없는 실정인 마당에, 《겨레말큰사전》을 편찬하는 일과 아울러 함께 남북 공동 서체를 개발한다는 것은 두 번 다시 놓칠 수 없는 역사적인 기회일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민족적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우리의 문화적 전통을 근본적으로 고찰하고 우리의 활자 문화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에 근원적이고 비판적인 분석을 기초로 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글의 전통적 고유자형, 서체 미학보다는 정확한 표기에 중점

1446년 세종대왕은 만백성을 위해 한글을 창제했다. 창제 당시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면 글씨체는 돋움(고딕)형으로 생겼다. 이를 놓고 한글 고유의 글자형이 돋움형이라 주장하는 이론이 있는데 문자의 고유 형태에 대해 논하는데 있어서 그렇게 단순히 초창기의 형태론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최초 혹은 초창기의 글자체는 서체 미학으로서의 형태론적 의미보다는 정확한 표기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글쓰기를 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표기이다. 더욱이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는데 있어서는 서체론적인 형식보다는 정확한 표기가 더 중요하며 이를 중시한 초창기 글자는 글자의 표현성보다는 단순성을 가지게 마련이다. 이는 한글 뿐만 아니라 로마자, 한자, 일본의 히라가나 등의 문자의 발전 과정에서도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글자의 고유자형이란 올바른 표기를 위한 글자 발생 초창기의 정확한 표기적 중심의 글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기나긴 세월을 거쳐 표기에는 완숙해진 후 나름대로 정착된 일련의 글자 표현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로마자는 로마의 비석에 쓰인 세리프형의 서체를 그 고유자형으로 하고 있고, 한자는 붓글씨로 쓰인 해서체를 그 고유자형으로 삼고 있다.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한국이나 일본 모두, 한자와 마찬가지로 가장 널리 사용된 붓으로 쓴 글씨를 기본으로 한 고유자형이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시대에 한글이 널리 쓰이게 되는 시기는 한글이 창제된 이후 300여 년이 지난 영,정조 시대이다. 이 시기에 정착된 한글 판본 글씨체를 보면 한글이 초장기의 돋움체에서 붓글씨를 기초로 한 바탕체(한글 명조체)의 형태를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

다.

오륜행실도

정조시대(정조 19년, 1795년)의 오륜행실도의 글씨는 이미 그 글씨가 거의 정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한글의 고유자형이란 (이미 돌아가신 고 김진평님이 주장하였듯이) 한글 붓글씨 표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정조 시대의 글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1. 오륜행실도(정조21, 1797)

그림 2~5. 글자의 변화과정 (좌부터) 1447 용비어천가, 1572 여씨향약언해, 1632 두시언해, 1768 송강가사

붓글씨 필법 최대한 살린 신명조체 개발한 최정호선생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바탕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명조체를 의미한다. 원래 근대의 납 활자로서 명조체라는 용어는 일본의 메이지유신 시대에 모도키 소조가 명나라 시대에 번성했던 한자 서예체라는 이름을 빌려 붙였다고 하며, 그 서체의 근본 특징을 세로 기둥획은 굵고 가로 줄기획은 매우 가늘어 그 대비가 심하고, 가로획의 끝매듭으로 삼각형의 비늘 장식이 있는 것으로 둔다. 활자체 문화를 일본으로부터 수입해간 중국은 그 이름을 명조라는 용어보다는 그 서예체의 근원이 송나라 시대에 있다하여 송체라 부른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활자 제작 유학을 다녀온 최정호선생은 명조체란 이름으로 동아출판사 등의 납 활자 서체와 납 활자를 만들어오다 일본의 폰트 회사 모리사와의 요청으로 사진식자기에 들어가는 한글 서체인 '신명조'를 만들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 디지털 아웃라인 방식의 서체로 정착되어 있는 한글바탕체(명조체)의 근본적 틀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최정호선생의 신명조를 1970~80년대 당시에는 모리사와 신명조라 불렀

고, 이를 빙자하여 신진 서체관련 학자들이나 개발자들은 한글 명조체를 “일본에서 수입해서 들여온 서체”라는 오명을 뒤집어 씌웠다. 하지만, 오늘날 한글 바탕체의 근본이 되고 있는 최정호선생의 명조체가 일본의 모도키 소조가 만든 한자의 명조체 필법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최정호선생의 신명조는 당시 일본 모리사와가 새로이 만든 사진식자용 활자인 신명조체 한자와 함께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한글 활자로 디자인한 것이지만 한글 고유의 붓글씨 필법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세로기둥획과 가로줄기획에 붓의 느낌이 나는 부리와 맺음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한글 궁서체 필법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유의 정갈한 붓의 흐름을 살림으로써, 펜 필법의 느낌으로 현대적이고 대비가 강한 멋을 살린 일본의 모도키 소조의 명조체와는 다른 차원의 글씨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림 6. 펜글씨 필법이 뚜렷이 나타나있는 일본 명조체 그림 7. 붓글씨의 정갈한 필법이 담겨있는 한글 명조체

붓과 펜은 차이점은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펜은 붓에 비하면 현대적인 느낌을 주며 당연히 서구적인 느낌을 준다. 일본의 모도키 소조가 한자에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멋을 더하기 위해 명조체에 펜의 필법을 도입하였고 그것이 당시에 당연시되던 서체 미학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정호선생이 궁서인 붓의 필법에 따라 명조체를 만들어 남겼다는 것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림 8. 붓글씨의 느낌이 강하게 살아있는 북한의 청봉체

북한의 경우에도 바탕체와 같은 본문 활자체로 청봉체가 있다. 이것은 현재 남한에서 사용되는 명조체에 비하여 붓글씨의 느낌이 더욱 강하다. 따라서 붓글씨 필법에 그 근본을 두고 디지털 기기의 도구적 특성에 어울리는 디지털 아웃라인 폰트를 새로이 제작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북한 공히 가로쓰기를 하는 동시에 띄어쓰기를 한다. 한글이 가로쓰기와 띄어쓰기를 한다는 것은 한자보다는 영어의 글쓰기에 가까우므로 한글 글자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조형적 특징에 따라서 그 글자의 너비가 서로 달라질 필요가 있다. 즉, 가변폭이 되어야 한다. 가변폭의 원리란 글자와 글자 사이인 자간의 일률성을 가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자간의 일률성을 도모하는 동시에 자모와 받침으로 어우러지는 한글 글자 자체의 상응성 또한 함께 고려하는 가변폭 활자체 제작의 일관된 논리를 가지고 접근해야 한글 11,172자 및 약 4,000여 자의 고어에 이르기까지 조화로운 타이포그래피가 되는 새로운 한글 활자체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전자책 시대에 더욱 빛을 발하는 한글 서체 만들어야

마이크로소프트사 타이포그래피 분야의 책임자인 빌 힐은 1999년에 “제2의 쿠텐베르크적인 인쇄혁명이 올 것임”을 선언했다. 그는 더 나아가 “새로운 쿠텐베르크적인 인쇄혁명이란 다름아닌 전자책(ebook)이 종이 인쇄 활자와 거의 같은 수준으로 만들

어지는 데에서 가능하며 마이크로소프트는 종이 인쇄용 아웃라인 폰트가 저해상도의 컴퓨터 화면에서도 그 미감을 제대로 표현해낼 수 있게 되는 클리어타입이란 환경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라고 주장했다.


그림 9. 쿠텐베르크적인 인쇄혁명에 대한 내용이 적시되어있는 Microsoft사의 사이트 화면 캡쳐
http://www.microsoft.com/presspass/features/1999/07-07ebooks.mspx

현재 클리어타입이라는 컬러 안티알리아싱 환경이 표준으로 되어 있는 윈도우의 새로운 OS인 비스타가 판매되고 있다. 그것의 기본 폰트들로는 시고UI(SegoeUI) 폰트들이 들어 있으며 그 중에 한글 폰트는 맑은고딕이며 일본 폰트는 ‘메이료’(명료라는

이름의 일본어), 중국 한자폰트로는 ‘야훼이’(아흑, 즉 맑고 검다라는 한자어)가 들어있다. 그런데 이들 모두 돋움체 스타일의 서체들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클리어타입이란 환경에서 영어의 본문활자체인 세리프체는 제대로 표현될지 몰라도(뉴욕 타임즈 등 서구 주요 언론은 세리프체로 인터넷 페이지가 출간되고 있다, 그림 10 참조) 명조체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한.중.일 동양 3국의 글자들은 가장 앞서 있다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우 환경에서도 제대로 표현되기 힘들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림 10. 본문이 세리프체인 georgia로 되어있는 뉴욕타임즈 사이트 http://www.nytimes.com/

하지만 우리 서체의 스크린폰트화를 미국의 한 회사에게 기댈 일은 아닌 것이다. 자국의 글자문화는 자국의 기술에 의해서 개발되어야 하며 그래서 자국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남북 모두 미국의 독점회사인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의 환경에서만이 아니라 오픈 소스인 리눅스와 같은 환경에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글자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표현해낼 수 있는 기술을 공유하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의 디지털 활자꼴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술을 새로운 남북 공동 개발 활자체 제작에도 적용하여야 한다. 그래야만이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의 문자혁명이 디지털 전자책 시대에 새로운 문화부흥을 일으키고, 그 기술로 만들어진 한자를 중국과 일본에도 수출하여 엄청난 지적 재산을 만들 수 있는 지식산업의 토대를 제공하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장주식 / ㈜LEXITECH 대표이사